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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정해준의 정원 인문학] 영국 풍경식 정원

2020-07-24

시민계급 부상, 산업혁명 인한 富 축적

伊 계단식 정원·佛 기하학 정원 유행

英, 정형적 아름다움 구습의 산물 비판

자연과 종속적 관계 아닌 우호적 전환

자유로운 야생, 장엄하고 낭만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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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피크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Lord Acton, 1834~1902)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콩코드 광장의 단두대에서 공개 참수형을 당하면서 이성의 세기 17세기는 막을 내린다. 유럽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 있어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시민계급으로 옮겨가는 근대의 전환점이 된다. 바다 건너 영국은 이미 1688년 무소불위의 절대왕정과 결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완성한 '명예혁명'으로 왕권을 헌법으로 제한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출발시켰다.

명예혁명의 성공과 근대민주주의의 탄생은 대규모 농업과 면직물 수공업으로 자본이라는 새로운 권력을 움켜진 시민 층의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안정적인 정치 환경과 탄탄한 국내 시장, 공격적인 해외 식민지 무역으로 자본가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고 산업 자본주의의 토양이 마련됐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의 증기기관 발명은 근대화의 촉매가 된다. 증기기관으로 촉발된 소위 산업혁명은 과거 공장제 수공업 방식으로부터 기계공업에 의한 대규모 대량 생산체계로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과 넓은 국내외 소비 시장, 풍부한 노동력, 여기에 철·석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은 영국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급변하는 사회상을 목격하고 주도한 자신감 충만했던 자본가들 사이에는 과거 질서는 곧 구습이며 인간 이성의 힘으로 타파해야 할 개혁의 대상이었다. 진보적·지적 사상운동이었던 계몽주의(enlightenment)는 인간이 이룩한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 그 속에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개선시키고자 하는 시대정신이었다. 산업화로 막대한 부까지 쌓은 지주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의 계단식 정원과 프랑스의 기하학식 정원 조성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매우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리고 여름 한두 달을 제외하고는 늘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와 드넓게 펼치진 평야도, 높은 산맥도 아닌 나지막한 목초지 언덕의 섬나라 영국이 아니던가? 계몽사상가들에게 영국의 자연환경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가성비 떨어지는 대륙 스타일의 정원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는 화려한 문양의 자수화단과 토피어리로 꾸며진 질서정연하고 깔끔한 기하학식 정원을 저급한 아름다움으로 뒤덮여 오히려 피로감을 준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더욱이 1815년 워털루 전투의 승리 이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의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면서 고전주의(classicism)를 표방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정원은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들에게 곧 구습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들만의 정원, 위대한 영국의 정원에 대한 욕구가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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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르길리우스의 영웅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바탕으로 조성된 은행가 헨리호어 2세의 스투어헤드 정원 (위). 이삭과 레베카의 결혼이 있는 풍경. 클로드로랭(1648) 영국 내셔널갤러리 소장.

영국에서 계몽주의가 퍼져나가던 시기, 상류층 자본가들은 자녀들을 영국 제국의 '세계 시민'의 교양인으로 키우기 위해 사회생활 전에 유럽 대륙으로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보냈다. 고전문화의 산지인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적지와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세련된 예법의 도시 파리가 필수 코스였던 그랜드 투어는 젊은 귀족의 자제들에게 세계의 정치와 사회·경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현장 중심의 엘리트 교육이었다. 장기 여행 중 만나는 찬란했던 고전문화의 유적들은 이미 잡초로 뒤덮이고 황폐화된 상태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받으며 방치된 상태였다. 이탈리아 빌라의 정원과 프랑스의 기하학적인 정원을 직접 보고 돌아온 후부터 그들은 정형적이고 경직된 모습의 고전적 정원에 더욱 매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귀족 자제들은 폐허로 변해 버린 이탈리아 캄파냐의 전원풍경을 담은 클로드 로랭의 풍경화, 신화적 서사를 전원풍경 배경으로 고대조각의 단편이나 신전의 폐허를 함께 그린 니콜라스 푸생의 풍경화를 마치 우리가 여행지에서 사진엽서나 냉장고 자석을 기념품으로 구입하듯이 수집했다. 플랜더스와 북부 이탈리아에서 처음 그려졌던 풍경화(landscape painting)는, 이렇게 유럽대륙을 거쳐 18세기 영국에서도 유행하게 되었다.

영웅서사시와 고전적 폐허의 모습이 농촌의 이미지들과 섞인 풍경화는 당시 인간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본 계몽주의에 반대해 인간의 감정과 감성을 강조한 낭만주의(romanticism)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다. 풍경화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산과 강, 호수, 들판의 실제 풍경에 목장, 폐허로 남아 있는 성이나 기념비,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수목 등을 강조한 이상화된 자연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당시 학자, 문인, 예술가들에게 있어 자연은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beauty)'을 가진 대상이었다. 이들에게 자연에서의 아름다움이란 풍경화 속 자연처럼 길들여지고(tamed), 정리되고(ordered), 만들어진(rendered) 것이었으며, 반대로 그것이 원시적이거나 야생의 모습일 때는 미학적 관점에서 '숭고미(sublime)'로 해석됐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숭고미는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었으며, 이에 대한 실천적 담론으로 산업혁명 이후 난개발에 의한 생활환경 파괴에 신음하던 영국에 자연의 아름다움과 전원의 풍요로움 되찾아줌으로써 치유하고자 했다. 지역 관습과 전통의 영적 가치를 중시한 민족주의적 낭만주의자들에게 영국의 완만한 지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수목과 푸른 초지 위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영국 농촌 풍경은 회복의 대상이었고 이는 곧 풍경 운동, 즉 이른바 픽처레스크(Picturesque) 운동으로 이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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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처레스크 운동에 있어 자연은 더 이상 인간에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우호적이며 동등한 관계였다. 전원시인 윌리엄 셴스톤(William Shenstone, 1714~1763)은 정원의 자연미를 위해서는 풍경화 속 그림처럼 아름다움은 물론 장엄함·우울함과 같은 감정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소유한 대지에 구습이 되어버린 권위적인 모습의 프랑스식 정원의 직선을 지우고 편안한 곡선 위주의 풍경화와 같은 정원, 즉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s)으로 개조했다.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1684~1748), 캐퍼빌리티 브라운(Capability Brown, 1715~1783) 등의 스타 정원사들은 화가가 캔버스 위에 풍경화를 그리듯이 굽이치는 언덕에 물줄기를 돌리고 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 전원풍경을 담은 녹색의 낙원을 조성했다. 자유로운 형태의 야생은 길들여지고, 정형적 형태의 기존 정원 자연스럽게 연출돼 정원은 로렝과 푸생의 풍경화 속 장면과 같은 모습을 담게 됐다. 의도된 풍경 속에는 고대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Vergilius)의 영웅서사시에 영웅이 겪는 고난과 환희의 인생 역정의 배경이 되는 신전과 암흑 동굴, 성스러운 숲을 폐허의 모습으로 세워 장엄한 경관을 연출했다. 이는 정원에 스토리텔링(Storyelling)을 입혀 낭만적인 장소성을 부여하는 도구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정원 주인인 자본가의 지위를 로마인의 후예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영웅의 삶에 빗대어 신격화하기 위한 숨은 의도도 있었다.
정해준 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hj.jung@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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