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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대구출신 서양화가 이쾌대...좌우진영 논리 내몰려 잊혀간 '한국의 미켈란젤로'

2020-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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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의 초상'

'이쾌대(李快大) 선생의 월북은 이념이 아닌 생존이었다.' 6·25 당시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에게 직접 그림을 배운 화가 이주영(2008년 74세로 작고)의 증언이다. 서사적이며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 일컬어지는 이쾌대가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포로 교환에서 북한을 선택한 것은 그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자신, 특히 가족에게 가해질 좌우 세력의 해코지를 두려워한 피란이란 증언이다.

이쾌대는 1913년 웃갓(上枝)마을 '오부자집'으로 통하던 경북 칠곡군 신리 39번지에서 창원 현감을 지낸 삼만석꾼 대지주 이경옥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설과 달성군 수성면(현 대구 수성구)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수성면 집에는 테니스장과 운동장, 교회와 학교, 연못이 있다고 알려진다.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이쾌대는 신동소학교에 입학, 수창보통학교로 전학해 졸업한다. 이쾌대를 말할 때 반드시 동생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의 형을 거론할 수밖에 없는데, 이상화 시인의 형 이상정과 함께 미술을 하고, 민속사에도 식견이 깊었다는 열두 살 터울의 이여성(李如星·본명은 명건(命鍵))이다. 형의 영향을 받아 이쾌대는 휘문고보 미술교사 장발(張勃·서울대 미대 초대학장, 제2공화국 국무총리 장면의 동생)에 사사해 재학시절인 1932년 조선미전에 '정물' 입선으로 화단에 데뷔한다. 


대구 삼만석꾼 막내로 출생
스승같은 존재 형 '이여성'
첫눈에 반한 유갑봉과 결혼
예술가적 삶에 지대한 영향
군상시리즈·조난·걸인 등
수많은 걸작 폭발적 생산


이쾌대는 첫눈에 반한 진명여고 출신 유갑봉과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 함께 도일해 1934년 도쿄제국미술학교(현재의 무사시노미술대학)에 입학한다. 당시로선 흔치 않게 도쿄에 아틀리에를 두는 등 유복한 생활을 하며 도쿄 녹포사 공모전, 이과전 등에서 '무희의 휴식' '운명'으로 입선, 서양화가임에도 동양화의 평면적인 채색과 선묘적인 특징과 상징적인 서사를 드러낸다는 평을 받는다.

이쾌대에게 형은 스승 같은 존재였다. 천재성이 발현된 치열한 학습과 탐구로 예술성과 사상이 무르익고 새로운 세계를 파악하게 되자 동생은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인 형에게 더욱 경도되었다. 이여성은 릿쿄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대구에서 3·8독립만세운동 후 혜성단을 조직해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과 독립운동을 한다. 아버지 몰래 땅을 팔아 군자금을 대려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투옥되었다가 출옥 후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지내며 '아일랜드민족운동' '약소민족운동의 전망' 등을 펴내며 사회주의 운동가, 언론인, 화가, 학자, 평론가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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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이쾌대-상황
'상황'

1939년 이쾌대 부부가 귀국하자 거부인 아버지는 옥인동에 아담한 한옥집을 마련해 준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엔 이미 이여성의 가족이 큰 2층 목조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쾌대는 1941년 이중섭, 문학수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서구의 지성과 방법론에 토대한 향토적이며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자 신만의 화풍을 구축해간다.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정간된 동아일보를 나온 이여성은 역사화를 그리며 신라의 솔거와 고려의 이념에 대한 책을 집필한다.

광복이 되자 이쾌대는 보문동에 '성북회화연구소'를 내고 후학을 양성한다. '물방울 화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김창열과 조각가 전뢰진 등 다수가 그때의 제자다. 이여성은 중도민족주의자 몽양 여운형의 오른팔이 되어 건국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남북통일정부 설립을 꾀하는 한편 철저한 고증을 통한 '조선복식고'를 발간한다. 그러나 좌우익의 극렬한 대립으로 여운형이 암살되자 미군정에 체포되고, 풀려난 이후 근로인민당 대표로서 1948년 초 평양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쾌대는 미군정에 의해 조선미술문화협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환멸을 느끼며 이승만 정권이 요구하는 반공포스터를 그리면서도 순수한 화가의 길을 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부인 유갑봉을 모델로 한 '2인화' 등 수많은 인물화와 단단한 해부학 수련을 바탕으로 인간에 대한 정열적 탐구를 웅변하고 있는 듯한 '군상' 시리즈, 독도 미군기 폭탄 투하 사건을 다룬 '조난' '걸인' 등 수많은 걸작을 폭발적으로 생산한다.

비운의 천재화가
근로인민당 형의 평양행에
포로로 오인 유엔군에 체포
가족들 지키기 위한 '월북'
이념 아닌 생존 위한 선택


1950년 6·25가 터지자 노모의 병환과 만삭인 부인 때문에 한강을 건너지 못한 채 인민군 치하 서울에 남아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강제 부역을 하게 된다. 9월초 인천상륙 직후 포로로 오인한 유엔군에 의해 거제도에 수용된다.

그나마 사람을 잘 사귀고 구김살이 없던 이쾌대는 수용소 안에서도 인망을 얻지만 그런 그를 '반공포로'였던 다른 막사 사람들이 질투해 제거 대상으로 찍혀 한 발짝도 막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다. 17만 명이 수용된 곳에서 하루에 수십 명씩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던 흉흉한 시절이었다. 시인 김수영과 정지용, 소설가 강용준도 당시 함께 갇혀 있었지만 서로 안면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걸인-이쾌대
'걸인'

"오래간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20일 서울을 떠난 후 5, 6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 (…)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 푼 없는 당신이 무엇으로 연명하는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밉살스럽기 한량없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오. 나는 이곳 포로수용소에서 나를 두둔해주는 친지들의 덕택으로 잘 있습니다. (…) 이곳 부산은 남방인 관계로 기후도 따뜻합니다. 내 걱정 과히 말고 모쪼록 당신 건강에 조심해 주시오. 이곳 나의 희망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건강입니다. 아껴둔 나의 채색 등 하나씩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흰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 설계를 새로 꾸며 봅시다. 내 마음은 지금 안방에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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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 시인

인편을 통해 보내 온 이 슬픈 편지를 끝으로 이쾌대는 북으로 가고, 그의 영원한 뮤즈인 부인 유갑봉은 1980년 사망할 때까지 남편의 생사를 모른 채 네 아이를 혼자 기르며 산다. 다행히 이재에 밝아 포목점과 택시회사를 운영하여 큰 돈을 벌지만, 가족들은 수시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한다. 이쾌대의 모든 작품은 워낙 좋은 물감을 쓰고 벽장에 숨겨 보관을 완벽하게 한 부인 덕분에 한 점의 훼손도 없이 1988년 월북 화가 해금 조치로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북으로 간 이쾌대는 1960년대 북한 사회주의의 형상화라는 새로운 '주체미술'에 동조하지 않은 '민족허무주의'라는 명목으로 중심에서 밀려났고,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65년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 그의 형 이여성은 김일성대학 교수를 지내다가 1958년 평남 순천의 도자기공장 화공으로 좌천된 것으로 알려진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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