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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칠흑같은 어둠 속 절규…극단적 선택 직전 한 관객은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2021-01-22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검은 눈물'의 화가 김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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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후의 작품은 보는 이를 참으로 불편하게 만든다.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뭉개지고 찢겨진 가장 남루하게 추락한 인간의 우울한 운명을 달래주려 검정색에 올인한다. 21년간 시종일관 그의 그림의 주제는 '검은 눈물(Black tears)'이다. 그는 모든 색을 다 포함하고 있는 극치의 색, 블랙을 모토로 동양화와 서양화의 미적 장벽을 허물고 있다. 추상을 거부하는 대신 형상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듯한 모호하고 애매한 심상화를 마치 번개처럼 한 획으로 스피디하게 그려내는 게 특징이다. 인간의 원죄와 불안을 주제로 한 '무제(Untitled)' 시리즈.

당장 내 인연의 살생부(殺生簿)를 작성했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고 했다. 아니다 싶으면 비수처럼 꽂았다. 어울렁더울렁 하는 여느 사교계 잣대로 보면 난 불한당, 아니 무뢰한이었다. 내한테서 '풍운아'를 읽고 가기도 했다.

검도와 서예를 품은 아버지. 부산 수산업계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협객'이었다. 후배 챙기기 달인이었다. 어머니도 막상막하였다. 평생 '공부해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림에 빠진 소년
한글도 모르고 학교 갔지만
공부하란 말 한번도 안들어
목욕탕·고고장서도 스케치

세상과의 단절
거장의 그림에서 위선 발견
아류는 싫어 후원스톱 선언
나만의 감옥서 그리고 그려
극한 위해 '내 피와도 결별'
사람들은 풍운아라 불렀다


초등학교 때 난 바보였다. 한글도 제대로 몰랐다. 교실에선 종일 창 밖만 내다봤다. 멈추지 않는 미소. 참 잘 웃는 아이였다. 뭘 보면 비슷하게 잘 그렸다. 또래를 위해 그림을 많이 그려 주었다. 친구들은 날 피카소라 치켜세웠다. 스케치북은 손톱처럼 항상 내 몸과 붙어 있었다. 부산의 웬만한 뒷골목 정경은 다 연필로 담아냈다. 누드크로키를 위해 목욕탕에 들어갔고 고고장에서도 스케치를 했다. 치열한 습작기였다.

서울 최고의 미대에 가려 했지만 인연이 아니었다. 낙방한 다음날 새벽, 대구역에 내렸다.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까지 걸어갔다. 그렇게 해서 계명대 미대와 인연을 맺는다. 물들인 검정군복 차림의 4년, 졸업작품으로 흙으로 칠갑된 추상표현주의를 선택했다. 회화사를 주름잡은 국내외 거장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난 거장의 그림 속에서 조작된 위선을 발견했다. 그들의 그들, 나는 내 그림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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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중국 유일 아카이빙 미술관인 송장 문헌미술관 초대전 개관식날 관객을 위해 웃옷을 벗고 난장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배냇저고리 보부상 시절

아직 난 현실이 뭔지 몰랐다. 그래서 잠시 그림과 멀어진 적이 있었다. 현대판 보부상인 양 여러 거리에서 좌판을 폈다. 배냇저고리를 처음 팔던 날을 잊을 수 없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아무 말도 없이 두꺼운 천막을 구해와 바닥에 깔아주고 갔다.

학창시절 품었던 명심보감, 대학시절 심지를 심어준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맘의 1번지를 찾기 위해 금강경을 품었다. 그런 어느 날 저자거리를 접었다.

이제 그림뿐이었다. 마지막 점검을 위해 청도 적천사 요사채에서 1년간 용맹정진. 그리고 전투 개시를 했다. 대구 수성구 범물동의 한 지하 공간에 진지를 구축했다. 내겐 거기가 카타콤(Catacomb·기독교도 지하묘지)이었다. 몇몇 분들이 물감값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나중엔 그 비용만 한 그림을 주면서 '후원 스톱'을 선언했다. 비장해지면 되레 차분해진다. 마냥 그릴 뿐 사람은 일절 만나지 않았다. 무문관(無門關) 같은 나만의 감옥을 자청한 것이다.

돌아보니 슬픈 자화상만 보였다. 자본이 키워낸 그 소외와 불안의 어둠. 그게 굴러가는 소리만 관조했다. 캔버스에서 난 매 순간 고사되고 있었다. 떨어진 바위를 영원히 산꼭대기로 밀어올려야 되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 같았다. 어둠을 먹고 자라는 음지식물의 근성. 나는 그걸 내 화폭에 차곡차곡 이식해 나간다. 아름다운 빛은 틈입하지 못하게 했다. 섬뜩하고 처절하고 비명을 지르는 아비규환의 그림이 이어질수록 내 이빨은 더욱 야성으로 치달았다. 부모 기제사도 외면했다.

극한의 몸을 갖기 위해 내 피와도 결별한다. 2017년 사혈 부항기 4개를 나침반처럼 머리에 빼곡하게 박았다. 매일 죽은 피를 콸콸 빼냈다. 날 향한 선전포고였다.

어둠 속에서 금빛이 돋아났다. 천자문의 첫 넉자.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의미가 저절로 풀렸다. 퇴로가 차단된 생명은 어둑해지고 궁극에는 칠흑에 든다. 그 어둠이 엄청난 압력을 갖게 될 때 빛이 돋아난다. 울음의 뿌리와 만날 때 비로소 평상심을 얻는가 보다.

인간은 울 수밖에 없다. 눈물은 액체로 변한 경전(經典). 나도 그림을 통해 나를 울기 시작한다. '흑루(黑淚)'. 그렇다. 내 생애 최대 사건이랄 수 있는 '블랙티어스(Blacktears) 시리즈'가 그렇게 해서 태어난다. 2000년부터 무려 4년간, 난 제사장 같았다. 수백 점이 주체할 수 없게 쏟아져 내렸다. 나는 내한테 놀랐다. 내 그림 50점을 빼들고 당시 선망의 갤러리였던 서울 국제갤러리 등을 직접 노크했다. 황당해 하던 큐레이터들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충격적인 작품
소외·불안·우울·아비규환…
서울 큐레이터들 황당해 해
어떤이는 지옥 떠올렸지만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기도

예술이란 무엇인가
의도된 예술은 죽음과 같아
예상치 못한 순간 경이로워
지구촌 작가들과 힘을 합쳐
비무장지대 통합展 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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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린 자화상 앞에 선 김길후. 그는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 자기 그림에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인류사에 남는 불후의 명작을 창조하고 싶어한다.

◆2008년 전관 그림대첩

2008년 나의 첫 대첩이 있었다. 대구보건대 인당갤러리 전관이 블랙으로 돌변한다. 내 그림의 한계를 다 보여주었다. 유채색을 검정 안에 구겨 넣었다. 인간의 슬픔과 비극을 고려 변상도처럼 장엄하게 터치해보려 했다. 독특한 질감을 위해 화폭에 수많은 칼자국을 심었다. 누군 지옥의 묵시록 같다고 했다. 뭉크의 절규, 프란시스 베이컨의 가학적 사디즘을 읽고 가는 이도 있었다. 자살 직전의 한 관객은 내 그림에서 극한의 슬픔을 보고 되레 위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 무렵 난 완전히 암흑에 도취된 사내였다. 잠시 백합을 오브제로 한 '시크릿가든'시리즈를 통해 맘의 안정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거북의 등껍질 같은 질감을 얻기 위해 수백 번 수천 번 물감을 탑처럼 쌓아 나갔다. 하지만 내 맘에는 들지 않았다. 이젠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세월만큼 육중한 터치를 얻고 싶었다. 머리로 그리지 않고 그냥 순간 맘의 기운으로 일획처럼 스피디하게 그려내는 일명 '스침화'의 물꼬를 텄다.

내 의도대로 그림이 그려진 적이 없다. 처음은 이것이다 싶지만 다 그릴 때쯤 예상치 못한 기운이 개입돼 엉뚱한 그림이 탄생한다. 그건 전율이고 경이로운 순간이다. 내 의도대로 끌고간 그림은 그 시대를 속일지언정 세상은 못 속인다. 상징이라는 것도 싫다. 동전을 그려놓고 태양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 상징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난 추상을 거부한다. 형태를 갖고도 모호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초월의 추상성을 그려낼 수 있다. 추상화는 죽었다. 나는 대신 모호한 형상을 추구한다. 형상인 것도 아닌 것도 아닌 그 모호하고 아슴한 경계를 안개처럼 덮치고 싶다.

◆난방없는 방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진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라 대답한다. 진실은 또 뭔가. 진실은 있는 그대로다. 자연이 위대한 것은 자연 자신이 자신을 누구에게 강요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도되고 조작되고 연출되고 덧칠되고 겨냥하고 도모하고 상징되고…. 그런 것은 모두 속물의 연장이다. 그건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런 류의 대가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를 향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진실은 나를 넘어서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가. 설정된 범주 안에는 절대 진실이 구현되지 않는다.

한 어부가 있었다. 그의 꿈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는 것. 하지만 그럴 겨를이 없다. 그런 어느 날 엄청난 풍랑을 만나 파도와 싸우다 기절해 버린다. 눈을 떠보니 꿈에도 그리던 시드니였다. 그 항해는 너무 고통스럽긴 하지만 자신의 일생일대 최고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다시 놀부의 박씨게임처럼 재현해보고 싶어 풍랑치는 날 바다로 나갔다. 배는 시드니가 아니라 저승에 도착해 버렸다. 예술은 의도되면 죽는다. 묘수도 없고 오직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운명적인 풍랑 속에서 신이 인정하는 '마스터피스(Masrerpiece)'가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지구촌 마지막 분단구역인 비무장지대를 노려보고 있다. 서쪽 끝 백령도에서부터 동쪽 끝 통일전망대까지. 그 248㎞가 전시장으로 보였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경판의 숫자만큼의 '우주만상도'를 내걸고 싶다. 지구촌 작가들도 모두 동참하는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그 통일을 위해 나는 동지들과 힘을 합쳐 통합의 그림을 그려야겠다.

뭇사람들은 따뜻한 집, 가족의 품에 행복이 있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산 너머에 무지개가 걸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는 핑계로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소홀하다. 나는 이타적 삶을 살지 못하는 이기적 인간인가. 식지 않는 에너지의 근원이 어딘지 잘 모르겠다. 3년 전엔 안압이 높아 눈수술을 받았다. 죽음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꽃이 진다지만 나무가 죽는 게 아니다. 그냥 열심히 그리며 다음생을 준비해야 된다. 금생에 좋은 작품으로 대가로 인정받는 건 전생의 공력이 이승까지 뻗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금생에 평가 못받으면 다음생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누굴 탓할 수는 없다.

나도 예순에 들었다. 근자에 조금씩 예술의 촉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젠 퇴로는 없고, 화옥(畵獄) 덕분에 난 매일 황홀한 포즈로 고락(孤樂)을 앓고 있달까.

글·사진=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김길후 화가는
1999년 그려 놓았던 그림 1만6천여 점을 다 소각해버린다. 2013년 이름을 바꾸고 2017년 '자기개조를 위한 피빼기 퍼포먼스'를 결행한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연작 주제 '블랙티어스'를 끌어가고 있다. 중간에 백합을 오브제로 한 시리즈 '시크릿가든', 그리고 '영웅시리즈' '인물변상도' 등을 그린다. 그는 블랙을 통해 동·서양 정신 통합에 주력 중이다. ▲2003년 대구 갤러리M 초대전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 '삶의 풍경전' ▲2005년 서울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 초대전 ▲2008년 대구보건대 인당박물관 '찬란한 슬픔전' ▲2011년 파주 헤이리 터치아트 갤러리 초대전 '아득한 어둠' ▲2013년 베이징 화이트박스(총괄기획 왕춘천) 초대전 ▲2018년 베이징 송장 아카이빙미술관(관장 우홍) 초대전 '존재와 허무' ▲2020년 창원조각비엔날레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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