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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제자도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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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교수)

연등불과 석가모니 부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등불을 전했다(傳燈). 깨달음의 등불을 전했다. 그러나 사실은 연등불은 석가모니 부처에게 아무것도 전달한 것이 없다. 다만 스승의 현존에 힘입어 제자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일어나 표면으로 올라온다. 진정한 스승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제자 앞에 현존하는 것이다. 제자가 이용할 수 있도록 바로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스승이 하는 일의 전부다.

스승의 발 아래 앉아 스승을 친견하는 것을 삿상(satsang)이라고 부른다. 삿상은 스승의 현존에 동참하는 것, 스승의 조화로움과 함께하는 것을 뜻한다. 스승이 거기에 있고 우리는 그의 곁에 앉는다. 아무런 말도 행위도 없다. 그러나 서서히 나는 스승의 분위기와 스승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전달된다. 고요한 각성 속에 있는 스승의 곁에 앉음으로써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스승은 내게 침묵으로 가르친다. 그 순간 나는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진다. 내가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전의 내가 아니다. 미지의 어떤 것을 맛본 바로 이 앎은 나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제자도(disciplehood)의 상징이며 은유다. 태양이 어디로 움직이건 해바라기는 그 방향을 따라 움직인다. 제자도란 '저는 완전히 열려 있습니다'하고 스승에게 입문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결단이다. 왜냐하면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전체적인 귀의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것, 나의 인생 전체를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는 것은 도박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진실로 제자 된 사람은 극히 적다.

가르침은 중요하지 않다. 선생이 중요하다. 요즈음 교육에서는 수요자 중심이라고 해서 선생보다 학생을 중요시한다. 학생이 아닌 제자는 배우기 위해 스승을 찾는다. 배운다는 것은 수용적이어야 하고 스승을 신뢰하며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현대 교육 이전에는 학생이 아니라 항상 선생이 중심이었다. 선생은 모든 것을 경험한 현자였다. 우파니샤드의 시절에는 삶을 학생기(學生期), 가장기(家長期), 임서기(林捿期), 유행기(遊行期)로 나눠 살았다. 임서기가 되면 사람들은 숲으로 가서 작은 학교, 즉 구루꿀을 세우고 선생이 되었다. 삶을 다 살아본 사람만이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자가 숲속으로 스승을 찾아와서 배워야 할 첫 번째는 듣는 법이었다. 듣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듣는 법을 배우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나의 마음이 완전히 침묵했을 때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다. 파도와 마찬가지로 물고기는 바다의 일부다. 그러나 물고기는 바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물고기가 바다에 대해 아는 것은 낚시꾼에 의해 뜨거운 모래밭에 던져졌을 때뿐이다. 그때 물고기는 자신이 무엇을 잊고 살아왔는지 깨닫게 된다. 사람도 무엇을 잊고 살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낚시꾼처럼 우리를 삶의 바다 밖으로 건져 올리기 때문이다. 삶의 바다에서 나오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맙소사, 나는 삶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살아왔구나. 나는 춤추고 노래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스승은 낚시꾼과 같다. 좋은 낚시꾼을 만나면 우리는 죽기 전에 바다 밖을 경험해 볼 수 있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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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걸 대구교대 교육학과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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