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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과 한국문학] 우리 근대문학과 까마귀와 까치

2022-09-29

韓문학작품에 빈번히 등장
길·흉의 상징 까치와 까마귀
이태준과 김동리 소설 통해
인간이 만든 관념 허상 탈피
공존해야 할 대상임을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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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까마귀와 까치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새이다. 그러다 보니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한다. '춘향전'(17세기 무렵)에는 춘향이 감옥에서 봉사를 청해 점을 보는데, 까마귀가 담벼락에 와서 까옥까옥 운다. 그러자 춘향은 까마귀를 저승사자로 인식하고 "방정맞은 까마귀야 나를 잡아 갈랴거든 조르기나 말려무나"라며 쫓는다. 그런데 봉사는 "좋다, 좋다, 가자는 아름다울 가(佳)자요, 옥자는 집 옥(屋)자다. 아름답고 즐겁고 좋은 일이 불원간에 돌아오리"라고 말한다. 봉사의 말처럼 이 도령이 장원급제하여 그녀를 찾아온다.

또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1908)에는 까마귀가 등장해 "우리 까마귀의 족속은 먹을 것을 물고 돌아와서 어버이를 기르며 효성을 극진히 한다"며 '반포지효'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우리가 떼를 지어 논밭으로 내려갈 때 곡식을 해하는 버러지를 없애려고 가건마는 사람들은 미련한 생각에 그 곡식을 파먹는 줄로" 알지만, 피에르라는 조류학자가 까마귀를 해부하여 해충을 먹고 산다는 것을 밝혔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 소리를 듣고 흉한 징조라 길한 징조"라고 말하는데 "무슨 소리든지 사람이 근심 있을 때에 들으면 흉조로 듣고, 좋은 일 있을 때에 들으면 상서롭게 듣는 것"이라 하며, 그것은 듣는 사람에 달린 것이라 했다.

이태준의 '까마귀'(1936)에서 '나'는 저녁마다 까마귀 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그런데 이웃 폐병쟁이 아가씨는 까마귀를 "복면하고 내 뒤를 쫓아다니는 무슨 음흉한 사내"로, "내가 죽으면 저 새가 덥석 날라와 앞에 설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는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까마귀 뱃속에 무슨 부적이 들구, 칼이 들구, 시퍼런 불이 들구 한 걸 봤어요"라고 한다. 나는 까마귀를 잡아 해부하여 까마귀 배 속도 다른 새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럴 기회도 없이 그녀는 죽고 말았다. 그녀의 장례날에도 까마귀들은 "그저 까악―까악―거리다가 이따금 까르르―하고 그 GA 아래 R이 한없이 붙은 발음을 내곤 하였다"고 작품은 끝난다. 폐병으로 인해 나약해진 그녀는 까마귀의 불길한 울음소리를 하나의 징조로 인식하는 속된 관념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편 김동리는 '까치소리'(1966)에서 동네 회나무에 둥지를 치고 사는 까치들과 "아침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오고, 저녁 까치가 울면 초상이 난다"고 하여 속신을 전면화했다.

"까작 까작 까작, 까작 그것은 그대로 나의 가슴속에서 울려 오는 소리였다. 나는 실신한 것같이 누워 있는 영숙이를 안아 일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천히 그녀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하여 다음 순간 내 손은 그녀의 가느단 목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봉수는 6·25전쟁으로 군대 간 사이 오랜 친구였던 상호에게 연인 정순을 빼앗긴다. 제대해 돌아온 봉수는 그녀와의 도피를 계획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자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서 꺼져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선다. 봉수는 자신을 따라온 상호의 여동생 영숙을 보리밭으로 잡아끌었을 때 저녁 까치가 운다. "이와 동시 나의 팔다리와 가슴속과 머리끝까지 새로운 전류(電流) 같은 것"이 흘러들었으며, 그래서 봉수는 영숙의 목을 누른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식의 황폐화를 까치 소리와 연결시켜 그려냈다.

예전부터 까마귀는 흉조, 까치는 길조로 여겨졌다. 문학작품은 그것이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현재 까치와 까마귀는 유해조수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관점일 뿐, 그들은 앞으로도 우리와 공존해야 할 대상이다.
김주현 경북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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