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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영국인들은 왜 버진퀸을 사랑했을까?

2022-10-07

[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영국인들은 왜 버진퀸을 사랑했을까?
[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영국인들은 왜 버진퀸을 사랑했을까?
박미영 (시인)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튜터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다. 헨리 8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 앤 불린이 처형당한 뒤, 왕궁 안에서 늘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1558년 25세 때 이복형제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의 대를 이어 왕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후 그녀의 치세 44년은 영국의 전성기였다. 1588년 칼레 해전에서 스페인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한 후 영국의 해상장악력은 극도로 확대되었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여왕은 175㎝의 키로 당대 기준으로 상당히 컸다. 마지막 튜더로 모두 왕이 된 세 남매 중에서도 아버지 헨리 8세의 붉은빛이 도는 금발과 매부리코까지 빼닮아 국민의 사랑을 받는데 한몫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아버지 헨리 8세에게 간통죄로 고발당한 뒤 3주 만에 타워 그린에서 참수된 어머니로 인해, 늘 지위와 목숨이 위태로웠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탓인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이 붙여준 별명이 '버진 퀸(The Virgin Queen)'이다. 그녀는 즉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남편에게 봉사하고 있으니 그는 잉글랜드 왕국이다(I am already bound unto a husband, which is the kingdom of England).'

하지만 날씬하고 젊은 미모의 여왕에겐 끊임없이 구혼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구혼한 것은 죽은 언니 메리 1세의 남편 펠리페 2세였는데, 바로 그 이유와 그의 평판이 영국에서 나쁘다는 것으로 인해 혼담은 바로 깨졌다. 그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막내아들 카를 대공, 사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신교도 귀족 로버트 더들리, 신교도 국가의 국왕 스웨덴의 에리크 14세, 러시아의 뇌제 이반 4세,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혼담들은 대부분 여러 가지 이유로 질질 끌다가 흐지부지되었다.

이것은 미혼 여왕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여러모로 불안정한 유럽에서의 정세를 좌지우지한 그녀의 현명한 처세였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세운 수장령에 의해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로 독립하여,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던 바티칸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가톨릭 국가들 틈새에서 결혼 교섭이 진행될 여지가 있다면 각국에서 침략을 개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 정적들과 악의에 찬 가톨릭국가들이 퍼뜨린 악질적인 소문을 낳았다. 심지어 프랜시스 베이컨이 엘리자베스 1세의 숨겨진 사생아고, 베이컨이 때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필명으로 글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구혼자 많았으나 왕좌 지키기 위해 미혼 고집
대신 젊고 유능한 남자들 총애하며 늘 곁에 둬
주변국 언어에 능통하고 국내외 현안도 통달


실제로 그녀는 젊고 유능한 남자들을 총애하여 곁에 두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평생 친우이자 연인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월터 롤리, 뛰어난 시인이자 자처해서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잉글랜드 원정군을 지휘하다 전장에서 전사한 필립 시드니, 유럽 최초로 조직적인 정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고 평가받으며 무적함대의 침략을 비롯한 수많은 외교적·군사적 위기에서 슬기로운 대처를 한 프랜시스 월싱엄, 해적 출신으로 사실상 엘리자베스 1세의 전투력이자 오른팔인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 당대의 명재상이자 잉글랜드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벌리 남작 윌리엄 세실,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던 마운트조이 남작 찰스 블라운트, 레스터 백작의 양자이자 여왕의 말년에 특히 총애받았던 에식스 백작 등 많은 청년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녀는 이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주위에 두고 그 파벌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견제하며 권력의 핵심을 항상 쥐고 있었던 절대 군주였다.

그것은 헨리 8세와 외교관 집안의 딸이었던 앤 불린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난 기질과 당대 어떤 남성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쌓은 방대한 지식에 기인했다. 그녀는 '설령 짐이 암사자는 아닐지라도, 짐은 사자의 자식이며, 그의 자질을 많이 물려받았노라'고 할 만큼 불같은 헨리 8세의 성정을 물려받았고, 어려서부터 하루 3시간씩의 독서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역사가인 타키투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고전을 번역하는 것을 소일로 삼을 만큼 라틴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웨일스어 등에 능통했다. 궁정의 방마다 책이 가득했고 각종 국내외 현안에 통달하여 즉위 초기부터 그녀를 여성이라 얕잡아보던 고문관들을 휘어잡았다.

백성들 목소리 귀 기울이는 자비로운 군주
순행 즐겨 찾아가는 도시마다 큰 환영 받아
양모산업 독려해 '굿 퀸 베스'로 칭해져


백성들에게는 그녀는 자비로운 군주였다. 왕실의 연례행사인 국내 순행을 매우 즐겨 당시의 도로 사정을 생각해보아 험난한 여정임에도 그 순행을 매우 즐거워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그녀는 만나는 백성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다소 무례한 태도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런 소탈한 면이 백성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다. 백성들을 풍족하게 만들기 위한, 나중에 인클로저로 인한 구빈법을 펼쳐야 할 만큼 부작용도 생겼지만 양모산업 등을 독려해 '훌륭한 여왕 베스(Good Queen Bess)'로 불렸다. 그녀가 가는 도시마다 각종 행사와 환영회가 벌어졌으며 이후 그곳은 '여왕의 도시'로 크게 부흥했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과 비밀리에 네덜란드 독립을 지원하고 있던 엘리자베스를 억제한다는 명목으로, 1만8천명의 병력과 22척의 갤리온급 전함과 대형 무장상선 108척을 동원하여 영국을 침공했다. 이른바 유명한 '아르마다 대회전(Armada Encounter)'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그녀는 추밀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군훈련장이 설치되어 있던 틸베리로 거처를 옮기고,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주위에 모여든 병사들을 바닥에 앉혀 놓고 연설했다.

"폭군들이여 두려워하라! 나는 언제나 신의 가호 아래 모든 국민의 충성심과 선의에서 힘을 얻으며, 또한 그것을 지키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과 생사를 함께 하기 위해 여기에 왔고, 신과 나의 왕국과 나의 국민을 위해 내 명예를 걸고 피 흘리며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내가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왕의 심장을, 영국 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 파르마건 스페인이건 유럽의 어떤 군주가 감히 내 왕국에 쳐들어와도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기꺼이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다. 나는 그대들의 장군이 될 것이며, 판사가 될 것이며, 모든 미덕에 관한 포상자가 될 것이다…."

그 결과 사략선으로 노획물을 공공연하게 배분하던 해적 출신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해군 총지휘관으로 한 영국·네덜란드 연합군대는 화공전을 펼쳐 무적함대에 맞서 대승을 거둔다. 사실상 폭풍 등으로 인한 스페인의 큰 손실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였지만, 이후 그녀가 차근차근 육성한 해군들은 추후 식민지를 늘리는 데 유용하게 쓰였고,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는 황금기(Golden Age)의 원동력이 되었다.

전쟁 이후 그녀는 문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그것으로 지금도 셰익스피어가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비록 그때 프랜시스 베이컨의 계몽주의 사상이 싹터 나중에 손자 찰스 1세의 처형과 청교도혁명을 야기시켰지만, 어쨌든 백성들은 집안에 악기가 하나씩 있을 정도로 르네상스에 이은 최절정 17세기식 문예부흥기를 누릴 수 있었다.

1601년 총애했던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런던에서 봉기를 일으켜 처형되자, 고령의 엘리자베스는 심신이 지쳐 우울증에 시달렸다. 1603년 3월24일, 69세를 일기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숨을 거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미국의 버지니아는 그녀를 추앙해 붙인 지명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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