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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주말&여행] 대구 달성군 하빈면 봉촌리 평화예술촌

2022-10-07

6·25 피란민 삶의 터전이 평화 소중함 되새기는 기념마을로…
강변 모래밭 일궈 정착…2016년 도시활력사업으로 거듭나
마을 입구 평화예술센터…평화축제·전시회·강좌 등 열려
골목마다 다른 이름…60~70년대 모습 사진 걸어 추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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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빈 PMZ 평화예술센터〈왼쪽〉. 이곳에서는 평화를 주제로 한 축제와 전시회가 열린다. 주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작은 카페와 특산물 판매장이 있다. 피란골목〈오른쪽〉에는 아이를 업은 여인, 수레를 끄는 사내, 짐 꾸러미를 이고 진 사람들 등 피란민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낙동강 제방 아래 축담을 따라 들어간다. 도로는 생각보다 넉넉하고 이따금 커다란 트럭이 오간다. 길가에는 작은 공장이나 이런저런 기업들이 번잡하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말끔하게 정돈되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공장부지와 사각으로 구획된 연밭도 보인다. 길이 살짝 꺾여 들어가자 마을이 나타난다. 하빈면 봉촌2리 낙동마을이다. 길가 판자벽에 몇 개의 사진이 걸려 있다. 1970년대 봉촌2리 초입을 지키는 마을청년들, 1960년대 낙동마을 개척 당시 존경받았던 노상빈 장로의 활동 모습 그리고 1960년대 낙동강 둑길 제방공사에 참여한 주민들의 모습. 그리고 이렇게 적혀 있다. '전쟁이라는 아픔, 피란이라는 고난, 마침내 피어난 평화예술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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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골목에서는 수레에 모래를 퍼 담는 사람들, 논둑에 모여 앉은 여성들, 총을 들고 마을을 지키는 청년들 등 오래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마주한다.


◆피란민들의 터전, 봉촌리 낙동마을

봉촌리의 남서쪽으로 낙동강(洛東江)이 흐른다. 동쪽은 구릉성 산지로 그 서편에 하빈천이 남북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낙동강의 활주사면과 하빈천 사이는 넓은 범람원으로 봉촌제방들, 안말등들, 오시늪들, 성남갯들, 새촌들, 새창앞들, 섬두독들 등의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봉촌리는 원래 사야촌(沙野村)이라 했었다고 한다. 모래벌판이라는 뜻이다. 이후 사야촌이 줄어 새촌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봉촌(鳳村)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새가 많아서 새촌 혹은 봉촌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많은 피란민들이 대구로 몰려왔었다. 당시 약 40만이었던 대구의 인구는 남하한 피란민들로 7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 수만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떠나지 않고 이곳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위주로 정부 주도하에 재민촌이 만들어졌다. 봉촌리 낙동마을도 그중 하나였다. 나라에서는 낙동강변의 모래밭이었던 하빈으로의 이주를 권했다. 그리고 주택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소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피란민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봉촌리로 모여들었다. 주택은 방 두 개와 주방, 거실로 구성된 송판 집이었고 마치 벌집처럼 촘촘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길가에는 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바람이 불면, 아이들의 벌건 입속은 모래로 버석거렸고 부모들은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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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촌제방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고 길가에는 가을빛이 시작된 수목들로 가득하다. 이 길은 낙동강 자전거 길로 강정보 녹색길에 속해 있다.

◆평화예술촌

봉촌리 낙동마을은 2016년 도시활력사업 공모를 통해 평화기념마을로 거듭났다. 사업에서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생활환경 개선이었다고 한다. 인체에 유해한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교체하고 재래식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개량했다. 또 장기간 방치된 빈집 11동을 철거하고 노후 담장을 보수했다. 그리고 좁은 골목에 과거와 미래를 위한 예술을 심었다. 그래서 낙동마을은 이제 평화예술촌이다. 마을 입구에는 '하빈 PMZ 평화예술센터'가 자리한다. 'PMZ'는 'Peace Memorial Zone'의 약자다. 이곳에서 평화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고, 평화를 주제로 한 전시회도 연다. 주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과 강좌도 진행하고 있고 작은 카페와 주민들이 생산한 여러 제품을 판매하는 곳도 있다.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열을 이루고 있다. 두어 채를 합해 넓어진 집도 있고, 층을 늘려 높아진 집도 있고, 새 집도 있다. 골목은 깨끗하고, 조용하다. 각각의 골목마다 이름이 있다. 피란, 삶, 그리움, 추억, 회상, 평화 등 바라보면 덤덤하고 되뇌면 저릿한 이름들이다. 아이를 업은 여인, 수레를 끄는 사내, 짐 꾸러미를 이고 진 사람들과 같은 피란민들의 모습을 본다. 헐벗은 제방과 수레에 모래를 퍼 담는 사람들, 논둑에 모여 앉은 여성들, 총을 들고 마을을 지키는 청년들, 소와 한복을 입은 여인 등과 같은 오래전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본다. 꽃들이 영원히 피어있고 시가 흐르는 골목도 있다. 호박 넝쿨이 낮은 지붕 위를 구르고, 잘 익은 대추가 골목길에 신선한 향기를 흩뿌린다. 철거된 집터는 풀밭이기도 하고, 텃밭이기도 하고, 마을 쉼터이자 봉촌주민갤러리이기도 하다. 벽에 걸린 주민들의 그림이 모두 풀꽃이다. 골목에 할머니 세 분이 앉아 계신다. "안녕하세요." "길을 잃었는 갑다." "아이다. 어데를 찾는 고만." 잔잔한 말씀들을 지난다.

촌락의 뒤편 성남갯들에 연밭이 넓다. 봉촌리는 대구를 대표하는 연 재배단지로 마을의 특산물은 연근이다. 이곳의 연 재배 역사는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하빈 땅은 모래의 구성비가 높아 논농사나 밭농사가 힘들었다.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반야월에서 종자를 구해 시험 재배를 시작했고 재배에 성공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연을 길렀다. 오늘날 봉촌리에서 생산되는 연근은 반야월 연근과 함께 전국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연잎들은 고개를 푹푹 숙이며 땅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곧 올해의 봉촌 연근이 세상 빛을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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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쪽으로 미끄러지는 길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가면 곧 낙동강이 펼쳐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소리, 풀벌레 소리, 새 소리, 이따금 스쳐 지나는 자전거 소리로 가득하다.

◆봉촌제방

제방으로 간다. 제방 바로 아래에 십자가 탑 높은 주안교회가 서 있다. 1968년 5월에 세워진 강변교회다. 과거 노상빈 장로의 주택 일부를 수리하여 기도처로 삼아오다가 봉촌교회 간판을 달고 창립예배를 가지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노상빈 장로는 허허벌판이었던 봉촌리에 터를 잡고 주민들과 함께 마을을 개척한 분이다. 특히 생계로 바쁜 부모들을 위해 탁아소를 운영하여 아이들을 돌보았고 구호물품을 지원받아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헌신했다고 전한다. 1992년에 마을주민들이 그를 기려 공덕비를 세웠다는데 찾을 수가 없다.

제방 길은 차가 다닐 정도로 넓고 길가에는 가을빛이 시작된 수목들로 가득하다. 이 길은 낙동강 자전거 길로 강정보 녹색길에 속해 있다. 북쪽으로는 성주대교와 하목정, 육신사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강정고령보로 향한다. 강 쪽으로 미끄러지는 길을 따라 조금 더 나아간다. 낚싯대를 어깨에 걸친 사내가 강으로부터 걸어 나온다. 낙동강이 반짝거리고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싸아' 소리를 낸다. 도처에 풀벌레 소리다. 머리 위에는 새소리다. 등 뒤로 '쌩' 하고 공기를 가르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지나간다. 평화로운 소리에 오래 붙잡혀 있었다.

글·사진=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 Tip

30번국도 달구벌대로 성주방향으로 간다. 성주대교 건너기 전 하산리, 봉촌리 방향으로 빠져나간다. 길 따라 직진하다 왼쪽 성주대교 아래를 통과해 나가 제방길 옆 하빈남로로 직진하면 된다. 초입에서 마을까지 약 2㎞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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