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서울로 거처 완전히 옮긴 후
해마다 명절 전날 밤 '안부 e메일'
제주서 보내온 형 시집에 미소도
'대구 재회' 그날까지 건필 또 건필
![]() |
장정일 형이 서울로 거처를 완전히 옮긴 후, 난 매년 명절 전날 밤이면 형에게 안부 e메일을 보냈다.
1. 『존경하는 장정일 형에게. 잘 지내시죠. 대구는 여전히 안전합니다. 어제는 범어동에 있는 필름통이란 곳에서 N선배님과 K형을 만나 영화와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맥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쯤, 형의 안부를 묻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형에 관해 아무런 말씀도 없으신 걸 보니, '잘 지내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 지난 여름, 전 오랜만에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엄청난 폭우로 서울이 수중도시가 되어버린 날이었죠. 종묘를 지나 빗물로 흥건한 종로3가 지하철역 앞을 지나칠 때쯤, 4년 전 형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던 회기역 주변 풍경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노래연습장 맞은편에 있던 '회기 호프'도 생각나고, 지하철 역사 안에 있던 '더 페이스샵'도 생각나고…. 훗, 차라리 저에겐 그 시절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명절 전날 밤이면 항상 형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형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때론 우울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합니다. 형, 즐거운 추석 되시고요. 청송사과가 검붉게 익어갈 때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 |
장정일 시집 '눈 속의 구조대' |
2. 『존경하는 장정일 형에게. 잘 지내시죠. 생활하는 곳은 예전 빌라 그대로인지, 반주로 드시는 막걸리는 어떤 종류인지, 민음사에서 출간예정인 시집은 언제쯤 나오는지, 많은 게 궁금해요. 형, 전 요즘 서재 한쪽 귀퉁이에 꽂혀있는 고전들을 다시 읽고 있어요. 눈이 좋지 않아 예전만큼 집중할 순 없지만 그래도 책과 함께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어제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민음사)를 펼쳤는데 예전에 밑줄 그어두었던 부분 중 아래와 같은 내용이 눈에 띄더군요. '세상엔 진리를 얻으려는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숴버리려고 해요. 스트릭랜드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먼저 형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형의 시를 보며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거든요.(물론 극히 주관적이었지만 그럴 만한 나이였죠.) 형, 피터 마샬의 자기연민에 찬 노년의 트럼펫 연주처럼 저도 이제 빛과 색이 많이 바랬나 봐요. 현재보다 추억 속에 사는 시간이 더 많아졌어요. 하지만 지금은 햇살 가득한 봄, 양지바른 언덕처럼 항상 따스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2019년 8월5일. 뜻밖에도 장정일 형의 시집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가 우편함에 도착했다. 발신지는 제주 애월. '아직도 제주도에 있나 보다. 애꿎은 뱀과 가구 같은 책 그리고 이름 모를 벌레들과 여전히 함께 하나보다…'라고 생각했다.
3. 『존경하는 장정일 형에게. 형, 시집 잘 받았습니다. 먼저 '제주'라는 단어에 살짝 흥분했어요. 사랑하는 그 누군가와 함께 꽤 오래 머무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머금어지더군요.(한국일보에 연재되는 형의 글을 통해 근황을 대충 알고 있었거든요.) 형의 사인이 들어 있는 속지를 기대했었는데 살짝 아쉬웠어요. 그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우편봉투에 있는 형의 글씨를 정성스레 오려서 시집 속지에 붙여 주었어요. 제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여자예요. 장선맘, 장정장… 너무 웃겼어요. 완전 재미있어 카페임에도 불구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죠. '삼중당 문고'를 다시 읽는 것 같았어요. 책을 덮고, 시는 왜 쓰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약간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 언제나 형을 응원해요. 형, 대구의 여름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잘 알고 계시죠? 이 열사(熱沙)로 에워싸인 사막 같은 도시에서의 해후를 기약하며, 그럼 다시 뵐 그 날까지 건필, 또 건필하십시오.』
※ 이번 회를 끝으로 '소설가 우광훈의 장정일傳' 연재를 마칩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우광훈 소설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