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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뉴스] 조선시대 노정 장군의 정체가 밝혀졌다

2023-03-29

대구 비원지구대 장군 공적비의 주인공
조선시대 제주판관, 경상도 중영장 역임
하멜 표류기의 하멜 일행 조사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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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 장군 송덕비 아래쪽 절반이 땅속에 묻혀 있다(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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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구 원대동 비원지구대 앞 노정 장군 송덕비.

대구 서구 원대동 비원지구대 출입문 서쪽에 큰 비석 하나가 있다. 비석 앞에는 365일 내내 지구대 경찰관이 떠 놓은 물그릇이 놓여 있다. 마을 평안을 기원하는 고사도 1년에 한 번 비석 앞에서 열린다.

이 비석은 그동안 조선시대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비, 덕을 베푼 늙은 옥리를 기리는 비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최근 향토사학계는 비가 '노정(盧錠)' 장군 송덕비라는 것을 밝혔지만, 노정 장군의 정체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대구부읍지', '조선왕조실록', '풍천 노씨 족보' 등을 확인한 끝에 노정 장군의 실체를 파악했다.

노정은 본관이 풍천으로 1615년 태어나서 1691년 사망했다. 무과에 급제한 후 제주 판관, 경상도 중영장(中營將), 경상좌수사, 전남우수사, 제주목사, 통제사, 훈련도정, 총융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선시대 관리로서 최고 영예라 할 수 있는 청백리에도 올랐다.

노정 장군과 관련된 3가지 에피소드가 눈에 띈다. 첫째는 1653년(효종 4)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 하멜 일행이 제주에 상륙했을 때 그들을 처음 만나 조사하고 보호 관리했던 인물이 바로 당시 제주 판관 노정이었다.('효종실록' 1653년 8월 16일 기사)

둘째는 그가 죽은 뒤 조정의 조치다. 특진관 강석빈이 숙종에게 보고하기를 "전 총융사 노정은 여러 번 요직을 지냈으나 죽을 때 집에 쌀 한 됫박도 없었고 입을 것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청백을 숭상하고 격려해야겠습니다"고 하자, 숙종이 왕명으로 제수와 제문을 내려 주었다.('숙종실록' 1691년 5월 21일 기사)

셋째는 대구와 관련이 있다. 효종 때 지방군사제도가 영장제(營將制)로 바뀌면서 경상도에는 전·후·좌·우·중·별영 6곳의 영이 설치됐다. 이 가운데 중영이 대구에 설치됐고, 초대(1654-1656) 중영장을 지낸 인물이 노정이었다.(대구부읍지) 영장제의 특징은 충청·전라·경상도 영장에는 문관 수령이 겸임하는 것이 아닌 정3품 당상관 전임 무관을 임명했으며, 군사는 물론 지금의 경찰업무에 해당하는 치안까지 담당했다.

노정 장군비는 오랜 세월 넘어진 채 방치됐다 지금의 비원지구대가 건립될 때 옮겨 세웠다. 비 아래 절반이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주민제안사업으로 2022년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비의 높이는 180㎝, 너비는 57㎝, 두께는 20㎝다. 비 전면에 희미하게 글자가 남아 있는데, 가운데 세로로 '영장노공정무휼군(營將盧公錠撫恤軍)'이 새겨져 있다. 아래쪽 송덕비문에 해당하는 글자도 일부 남아 있다. 왼쪽에 '정유오월일입(丁酉五月日立)'이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366년 전인 1657년 5월 비를 세웠다는 뜻이다. 노정 장군 송덕비는 달성군청 앞에도 있다.


글·사진=송은석 시민기자 3169179@hanmail.net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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