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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봄] 나는 행복합니다

2023-10-31

[마음·봄] 나는 행복합니다
곽호순 (곽호순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 어려운 받아쓰기 시험을 50점이나 맞았을 때, 더 행복한 것은 장하다며 울 아빠 누런 봉투에 통닭 두 마리 사 오셨을 때. 낡은 대나무 우산 살대 가늘게 쪼개 가오리연 만들었는데 마침 동내 언덕에 바람 세게 불 때. 술래잡기하다 말고 감꽃 소복이 떨어진 감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감꽃 목걸이 만들 때.

내 친구 옥자는 언제나 나에게만 그 많은 비밀을 얘기하는데, 손가락 꼬옥 걸던 그 약속 계속 지키고 있을 때. 추석 전날 새 신발을 사서 머리맡에 두고 자기 전에 다시 한번 만져 봤을 때. 가을 운동회 때 달리기 4등으로 달리는데 3등 달리던 아이 넘어질 때. 숙제 안 한다고 형이 아빠에게 혼나는 소리 들으며 나는 다락방에서 들키지 않고 감춰둔 만화책 읽을 때. 늦잠 자다 일어나 급히 학교에 갔는데, 그날이 일요일 오후였을 때.

전해진 소문에 의하면 학교에서 일하는 소사가 학교 지킴이 구렁이를 잡아먹는 바람에 우리 학교는 소풍날마다 비가 온다는 4학년 언니의 불길한 입방정 때문에 밤새 몇 번이고 창문 열고 확인했는데, 다행히 소풍 날 구름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일 때. 며칠 동안 학교에 오지 않는 친구 집 찾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만 졸아버렸는데, 마침 친구 집이 버스 종점 부근이었을 때.

큰 나무 뒤에 숨어 뒤꿈치 들고 첫 키스 했는데 사락사락 숨소리 들려 가만히 눈 떠 보니 눈이 내릴 때. 대합실 밖엔 눈 내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막차를 기다리며 사이다도 없이 찐 계란을 먹고 있는데, '삶은 계란'이라고 가게 유리창에 붙여진 글귀를 보고 삶을 깨닫게 됐을 때. 떠나는 버스 쫓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이왕 넘어진 것 그 참에 쉬어 갈 때.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 동백인데, 동백이 데리고 산책하는 길에 큰 개가 버티고 서 있어도 낮게 으르릉거리며 나를 뒤 세우고 당당히 지나갈 때.

새벽 비에 낚싯대 정리하는데 붕어 물려 있을 때. 장화 샀는데 마침 비 올 때, 그 비 오는 날 툇마루에서 장화 벗고 지짐 먹을 때. 몇 년 전 넣어둔 옷에서 만원짜리 두 장 나왔는데 마침내 아내가 곁에 없을 때. 4개월 된 우리 아들 뒤집기 할 때. 갓 돌 지난 그 아들에게 물렸는데, 내 팔뚝에 이빨 자국 선명할 때. 돼지 꿈꾸고 로또 샀는데 본전 했을 때. 그 로또 바꾸어 새 로또 샀을 때. 자기 전에 곰곰 생각해 보니 마음에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을 때.

항암제 치료 후 딸이 사준 모자가 너무 잘 어울릴 때. 그 모자 쓰고 거울 보니 오드리 헵번 같을 때. 자해로 깊게 파인 왼쪽 팔목 상처 위에 너무 잘 어울리는 타투 했을 때. 혈관 연결 수술했는데 혈관에서 맥이 느껴질 때, 그때 마침 기다렸던 방귀까지 같이 터질 때. 아직은 바늘귀에 실 끼울 수 있을 때. 아직은 내 발톱 내가 깎을 수 있을 때. 마주친 친구 이름 생각 안 나 진둥한둥 인사만 하다가, 돌아서서 생각하니 생생히 떠오를 때. 난초 꽃필 때, 그 난초꽃을 아직은 볼 수 있을 때.

곽호순 (곽호순병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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