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40501010000122

영남일보TV

[더 나은 세상] 헌재 발(發) '구하라법'

2024-05-02

헌재 유류분 법개정 결정에
진척없던 '구하라법'도 주목
민법 상속제 수십년만 손질
시한 맞춰 급하게 처리말고
22대국회선 충분한 논의를

2024050101000039900001221
정혜진 변호사

될 듯 될 듯 싶다 끝내 안 되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안 되는가 싶어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물꼬가 트여 풀리는 사건이 있다. 사건도 사람 인생을 닮았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법도 그런 것 같다. '구하라법' 이야기다.

양육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 자격을 제한해야 한다는 취지로 2020년에 제안된 민법 개정안 '구하라법'은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20대 국회의 임기 만료와 함께 결국 폐기되었다. 21대 국회에서는 논의가 더 진척되었고 지난해 하반기에는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할 것 같은 희망이 보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국회는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오는 5월 말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다시 한번 폐기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회가 아니라 헌법재판소에서 '구하라법'을 다시 살려냈다. 지난 목요일 헌재가, 피상속인을 장기간 유기하거나 정신적·신체적으로 학대하는 등의 패륜적인 행위를 일삼은 상속인의 유류분을 인정하는 것은 일반 국민의 법감정과 상식에 반하므로 유류분 상실사유를 두지 않은 민법 규정에 대해 헌법에 맞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도화선이 됐다. '구하라법'과 직접 관련은 없는 47건의 유류분 관련 사건에서다.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는 것처럼, 여론의 지지를 받는 법안의 운명도 그랬다. 소(小)가 대(大)를 살리다니, 이 점이야말로 '신의 한 수' 같다. 구하라법은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가 상속인이 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상속 제도 자체(大)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상속 제도 중 일부(小)인 유류분 제도에 한해 판단하였지만, 피상속인에 대해 패륜행위를 한 상속인은 상속인 자격이 없다는 판시 내용 자체는 '구하라법' 취지와 똑같다. 헌재는 국회에 대해 유류분 상실사유를 규정하지 않은 민법 규정을 개정하라고 2025년 12월31일까지 시간을 주었다. 국회가 유류분 상실사유를 도입하려면 그 전제로 상속 상실사유를 같이 손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헌재의 결정문 중 유류분 상실사유 입법 미비 부분에 관한 내용은 고(故) 구하라의 오빠 구호인씨가 한 말의 취지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거죠. 자식 버린 부모가 자식의 죽음으로 되레 큰 이익을 얻는 걸 법이 그냥 두고만 본다는 게. 무슨 법이 이런 법이 있나 싶고." 필자가 '구하라법'을 포함하여 사람 이름을 딴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글을 쓰면서 취재할 때 들었던 그의 울분 섞인 목소리가 헌재 결정문 속에 그대로 녹아있어 더 반가웠다.(필자의 글은 2021년 '이름이 법이 될 때'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21대 국회는 오는 5월 말로 임기를 마감한다. 그전까지 임시국회를 열어 '구하라법'을 통과시키는 건 시간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출범할 22대 국회에서는 헌재가 준 시한을 맞추기 위해 법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민법 상속 제도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전반적으로 개정하는 것이니 21대 국회에서 급하게 처리하기보다는 22대 국회에서 차분하게 심도 있는 논의를 충분히 한 뒤 만드는 게 더 좋겠다 싶다.
정혜진 변호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