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
    스토리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40502010000372

영남일보TV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청년 이승만, 어떻게 지도자로 성장했나

2024-05-03

이승만은 의병항쟁보다
외교를 통한 독립 생각한듯
미국 박사 고위층 소통 경력
임정수립안에 국무총리 등
이름을 올릴수 있었던 이유

2024050201000102300003721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최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논란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울에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하며, 그를 다룬 다큐 영화가 상영되었지요.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마든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지만, 반드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야만 하겠지요. 우선 몰락양반 가문의 청년이 어떻게 민족 지도자로 부각되었는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의 학생이었던 이승만은 1898년 3월 독립협회가 그를 만민공동회의 연사로 내세움으로써 급속하게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곧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1899년 1월 박영효 역모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어요. 그러나 증거는 불충분했고 미국공사의 석방 요청도 있어 풀려나올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모하게도 동료들을 따라 탈옥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재판을 받고 종신징역형을 받았는데, 죄목은 역모죄가 아니라 탈옥미수죄였어요. 하지만 그해 말에 10년으로 감형되었고, 결국 5년 7개월이라는 기간을 죄수로 갇혀 있었어요.

그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과 학교를 운영하였으며 '제국신문'을 비롯한 언론매체에 기고를 했어요. 원고 집필과 번역서 발간도 가능하여 그의 대표저작으로 손꼽히는 '독립정신'도 이때 작성한 것입니다. 감옥은 오히려 그에게 활동공간을 넓히는 역할을 했어요.

이승만은 출옥한 지 몇 달 지난 1904년 8월에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민영환과 한규설에 의해, 미국 정부에 거중조정을 요청하는 밀사의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지요. 그는 조선주재 미국공사을 지낸 딘스모어 의원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구체적인 답변도 듣지 못한 채 밀사의 임무를 끝냈어요.

그리고 미국에 남아 유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윤병구 목사와 함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서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 달라는 청원서를 내밀었어요. 루스벨트는 주미 공사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라고 했지만, 이는 외교적 제스처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이미 일본의 조선 지배를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승인한 상태였지요.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의 대통령을 직접 면담했다는 것은, 그의 명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뉴욕 타임스에도 두 차례나 보도되었고,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박장현은 이 사실을 '황성신문'에 기고하여, 이승만을 "한국 인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존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고 높이 평가하였어요.

그런데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교민사회는 대대적으로 모금을 하여 유학생이던 그에게 법정 통역을 요청했어요.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재판의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이승만이 생각한 것은 기독교와 미국에 의지한 외교를 통한 독립이었습니다. 그에게 의병항쟁과 의열투쟁은 부질없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박사까지 했다는 학력과 미국의 고위층과도 소통했다는 경력은 높이 평가되었지요. 3·1운동 이후 여러 지역에서 발표된 임시정부 수립안에 집정관 총재 또는 국무총리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영남일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