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년전 그날 밤…거센 동해 폭풍우에 키 부러지고, 배 흩어지고
밤 11시50분에 출항한 배가 다음 날 아침 6시40분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했다. 크루즈터미널 옆으로는 울릉공항이 한창 건설되고 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이 겪은 험난한 여정을 더 이상 겪지 않고도 이제는 울릉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
밤 9시, 포항 영일만신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울릉도로 가는 터미널은 총 4곳. 요즘은 뱃길이 좋아져서 강릉, 동해, 울진, 포항 그 어디서든 쾌속선을 타면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굳이 가장 긴 노선, 밤새 달려야 하는 뱃길을 선택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은 울릉도 수토 뱃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긴긴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우리 역시 목숨까지 걸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하룻밤은 배를 타고 달려야만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밤 11시50분에 출항하는 울릉 크루즈는 6시간 30분을 밤새 달리기 때문에 갑판 위에서 일출을 볼 수도 있다. 수토선에서 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울릉도 남쪽 해안에 도달했다는 '울릉도사적'의 기록을 최대한 체험해볼 수 있는 코스다. 뱃길이 긴 만큼 귀에 붙이는 멀미약에 먹는 멀미약까지 챙기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울릉도를 향해가는 뱃길 위에는 멀미는커녕 왠지 가슴 뭉클해지는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330년 전 악천후의 그 밤
"아마 이 시간쯤이었을 거라. 여기 기록에 보면, 술시(戌時)라고 나오니까 이게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를 말하는 거거든? 장군의 수토선이 대양 한복판에서 첫 풍랑을 만났다는 거야."
배에 타자마자 장군의 후손인 순천 장씨 대종회장 장선호씨와 조카뻘인 장수용씨가 '울릉도사적'을 꺼내 펼쳐 들었다. 여기는 울릉 크루즈의 갑판 위, 아직 배가 출항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후손들의 마음은 벌써 동해 한가운데 와 있다.
"'이는 필시 수종(水宗)이니 이 때문에 배들이 물결에 휩쓸려 일시에 흩어져 향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짐 실은 배며 사람 실은 배까지 6척의 수토선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거야. 수종(水宗)이란 건 물마루, 그러니까 수평선이 높이 치솟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거든. 순풍을 기다려서 출항했는데도 바다 날씨는 알 수가 없지. 특히 그날은 파도가 거셌나 봐.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야."
그저 어렵기만 하던 울릉도사적의 기록이 후손들의 대화 속에서 천일야화보다 더 흥미진진해졌다. 330년 전 그날 밤, 울릉도를 향해 가던 장군의 수토선은 후손들의 이야기만큼이나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자시(子時), 그러니까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에 검은 구름이 북쪽에서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대. 번개가 번쩍이고 그 섬광이 파도 속까지 뚫고 들어가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면서 뒤이어 소나기까지 쏟아졌다는 거라. 그 당시 배라고 해봐야 제아무리 크게 잘 만들었다 해도 목선에 돛단배 아니었겠어? 성난 파도가 공중으로 솟구치니 타고 있던 수토선도 덩달아 떴다 가라앉았다…"
우리가 탄 배는 아직 출항도 안 했는데, 이야기만 듣고도 벌써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150여 명의 수토사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질 즈음, 풍랑은 더욱 악화되어 방향을 잡는 배의 키마저 부러졌고 급기야 배를 제어하기도 힘든 상태가 됐다고 한다. 결국, 배 젓던 노를 선미와 좌우에 꽂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금세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다고 장군은 그날 밤을 기록하고 있었다. 과연 장한상 장군과 수토사 일행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은 그때, 흰색 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크루즈의 승무원이 다가와 혹시 장한상 장군의 후손 일행이냐고 물었다. 이 배의 운영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1694년 9월19일 수토사 일행 출발
뱃길 험해 150여명 생사 넘나들어
이튿날 간신히 울릉도 도착 유숙
험했던 바닷길 지금은 크루즈 다녀
장한상 장군의 수토기행에 나선 장군의 후손 장선호씨(왼쪽)와 장수용씨가 이른 아침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 울릉도를 바라보며 하선 준비를 하고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이어지는 여정에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
지난 2021년 울릉도 주민들의 뱃길이 끊기자 2만 t급 대형 크루즈를 취항한 조현기 상무. |
◆울릉도호박엿 공장 하다 뱃길을 열게 된 사연
"동해는 서남해와 달리 바람이 초속 12m 정도만 돼도 풍랑이 일어 배가 뜨지 못합니다. 동해의 특성상 파고가 높고 악천후가 잦아서 1년에 120일 정도는 발이 묶이기 예사였죠. 육지에 있는 부모 형제가 세상을 떠나도 우리 울릉주민들은 부두에서 눈물로 애만 태울 때가 많았습니다. 배가 떠야 가지요."
1883년(고종20)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5대째 울릉도에 살고 있다는 울릉도 토박이 조현기 상무는 그렇게 이 배를 취항하게 됐다며 후손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최초의 수토사로 파견된 장한상 장군 이후 200년간 수토사들이 험난한 뱃길을 이어가며 일본인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준 덕에 울릉주민들의 오늘이 있게 됐다는 얘기다. 당시 수토사들의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그는 매일 실감한다고 했다. 어지간한 배로는 동해 풍랑을 이겨낼 수 없어 무려 2만t급 대형 크루즈를 띄운 것이 2021년 9월. 장한상 장군이 출항하던 그해 9월처럼 만반의 준비를 끝냈지만, 첫 출항하던 날 하필 태풍 예고가 있었다고 했다.
"웬만한 풍랑에도 문제없이 출항 가능하지만 첫 출항인 만큼 신경이 많이 쓰였죠. 기상특보를 피해 예정된 시간보다 출항 시간을 조금 당기긴 했지만, 결항 없이 무사히 울릉도에 도착했습니다. 취항 신고식 제대로 한 셈이죠."
장한상의 후손들이 배를 탄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라도 드리려고 일부러 기다렸다는 그를 보면서, 이 역사적인 순간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인 궁금증이 떠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렇게 큰 배를 살 수 있는 걸까.
"당시 대기업들은 다들 돈이 되지 않는다면서 모두 이 사업을 포기했어요. 기존에 운행하던 배는 수명이 다 돼서 운행이 중단됐는데 새 여객선을 운행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던 상황이었죠. 울릉도 주민들이 당장 섬을 오갈 수가 있어야지요. 울릉도 주민, 다 합해봐야 9천명인데 주민들 발이 되어주자고 매일 이 큰 배를 운행할 수는 없다는 거죠. 할 수 없이 한국해양대 나온 형님이 총대를 메고 동생이 울릉도호박엿공장을 해서 번 수익을 몽땅 털어 부었습니다. 물론 지자체 지원도 받고요.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라 발이 되자고 하는 일이니까요."
말수 적고 점잖기만 한 조현기 상무를 대신해 옆에 있던 김영기 이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거들었다. 그렇게 울릉도호박엿공장을 하며 노후 걱정 없이 살 수도 있던 조씨 형제의 삶이 매일 배 기름값을 걱정해야 하는 삶으로 180도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
"그래도 이게 다 주민들 덕분입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옛날 그 험한 뱃길을 마다 않고 이 섬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이고요."
그러면서 그는 또 한 번 장군의 후손들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크루즈가 뱃고동 소리를 두 번 울렸다. 출항할 시간이다. 그러자 조현기 상무가 서둘러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인사 드렸으니, 저는 또 나가서 부지런히 기름값 벌어야지요"
육지와 울릉도, 독도를 오가며 섬을 관리하고 왜구를 토벌하던 330년 전의 수토선. 울릉군은 옛 울릉중학교 태하분교 부지에 세워진 울릉 수토역사전시관 마당에 길이 28m, 너비 9m, 높이 7m의 수토선을 복원해 놓았다. 장한상 장군이 쓴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에 따르면 당시 수토사의 규모는 역관과 구실아치, 사공과 곁꾼까지 모두 150명이었다. |
◆330년의 시간을 건너 마침내 울릉도에 닿다
바다도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까. 배가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파도는 잠잠했다. 배가 큰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장한상 장군의 뱃길과 최대한 비슷한 여정을 택한 것이 오히려 멀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뱃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군은 후손들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길을 열고 있었다. 천일야화를 이어가기 딱 좋은 밤이다.
"비바람이 점차 잦아들고 동이 터왔지만 섬은 북쪽에 있는데 물살은 동쪽으로 흐르고 있기에, 배 안의 사람들이 이로 인해 정신을 차리고 힘껏 노를 저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섬을 향해 갔습니다. 사시(巳時·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쯤 간신히 섬의 남쪽 해안에 도달하여 바위 모서리에 밧줄을 묶었습니다. 잠시 뭍에 내려 밥을 지을 때 급수선 4척은 점차 다가오는데 복선(卜船)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유시(酉時·오후 5시부터 7시 사이)쯤 또다시 남쪽 바다에서 당도하여 각각의 배가 모두 화를 면하였습니다. 남쪽 해안에는 배를 정박할 곳이 없어 동쪽과 남쪽 사이 동구에 배를 대고는 유숙하였습니다."
장한상 장군이 기록한 '울릉도사적'의 첫째 날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선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창밖으로 어슴푸레 동이 터 오른다. 저만치 바다 안개 너머 신비로운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울릉도다!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공동기획 :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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