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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소설가 |
1712년 6월28일 '사회계약론' '에밀' '인간 불평등 기원론' 등으로 유명한 루소가 태어났다. 루소는 계몽사상가로 분류된다. 계몽사상가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 신뢰를 기반으로 인류사회의 진보를 추구한 철학자를 가리킨다.
루소는 무지와 미신을 배척했고, 이성에 반하는 인습과 제도 타파를 주장했다. 주권 재민을 말했고. 자유와 평등을 고취했다. 루소 등 계몽사상가들의 생각은 일반시민들에게 받아들여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루소보다 80년쯤 앞서 로크도 사회계약론에 바탕을 둔 논리를 펼쳤다. 자유와 재산권은 인간의 자연권이고, 인류는 자연권을 더욱 확고히 누리기 위해 계약을 맺고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이 로크 정치사상의 근간이다.
그런 점에서 로크는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토대를 구축한 세계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로크는 1689년 피 흘림 없이 성공한 '명예 혁명'을 보았다. 당시 영국 시민들은 의회 입법권 등을 제정해 입헌정치의 새 역사를 연 '권리 장전'을 발효시켰다.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을 보지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은 루소 타계 11년 뒤에 일어났다. 루소 생존 마지막 해인 1778년 프랑스는 절대왕정국가다운 방식으로 국가재정을 파탄 내고 있었다. 미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했는데, 미국인의 인권 신장을 도모해서가 아니라 경쟁국 영국을 견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루소는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하는 장면도 보지 못했다. 물론 대혁명 5년 뒤(1794) 공화정 급진 자코뱅당 지도자 로베스 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장면도 아니 보았다. 다시 10년 뒤(1804) 나폴레옹이 제정 복고로도 모자라 '유럽 황제'를 꿈꾸며 온 세상을 전쟁터로 만드는 참상도 루소는 아니 보았다. 어쩌면 프랑스 대혁명 전에 타계한 것이 루소의 정신건강에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는 1889년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기술과 산업의 상징 에펠탑을 세워놓고 그 아래에서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박람회 일부는 '식민지관'이었다. 프랑스는 식민지관에 '원주민'을 '상품'으로 진열했다. 세계 1등국가 프랑스 국민들은 '원주민 상품'을 구경하며 환호했다.
인간의 이성을 결코 신뢰할 수 없는 그 상품을 보았다면 루소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인간이 아닌 '원주민 상품'의 존재를 알았으면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내용이 좀 더 풍부해졌을까? <소설가>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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