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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시대정신] '규율'과 '폭력'의 미묘한 차이

2024-07-30

남이 명령하고 강제 아닌
스스로 규칙준수하는 것이
바로 문명화된 규율이다
비폭력적 규율에 기반한
새 교육프로그램 개발해야

[이진우의 시대정신] 규율과 폭력의 미묘한 차이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선수로 성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타고난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더라도 적절한 훈련이 따르지 않으면 좋은 선수가 되는 것은 싶지 않다. 엘리트 스포츠의 영역은 종종 강렬한 압력과 높은 위험과 관련이 있다. 운동선수는 최고 성능을 달성하기 위해 한계에 부딪히며 엄격하고 까다로운 훈련 체제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는 스스로 자신의 잠재적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한계까지 내몰기도 하지만, 때로는 코치와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한계를 실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종종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전술에 의존하는 폭력 문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트레이너는 운동선수가 인지한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기 위해서 신체적, 언어적 학대를 포함한 가혹한 훈련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한 스포츠에서 탁월성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이 훈련과 규율을 필요 이상으로 극단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규율이 없는 훈련은 가능한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분명한 '아니오'라면, 우리는 이렇게 다시 물어야 한다. 규율은 꼭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가? 비폭력적 규율은 불가능한가? 얼마 전 있었던 SON축구아카데미 지도자들의 아동학대 논란은 이런 물음을 제기한다. 아카데미 측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언행은 결코 없었다고 주장하고, 시민단체들은 문제의 본질은 지도자들의 폭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카데미의 코치진이 아이들 상대로 지속적, 조직적, 신체적, 정서적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카데미 학부모들은 문제가 될 만한 체벌과 아동학대는 없었다고 감독과 코치진을 두둔하고 나섰다고 한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것은 감독과 코치진의 욕설과 고성과 질책이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적절하지 못한 이러한 행동도 훈련과 규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몸에 직접 고통을 주어 벌하는 체벌은 다반사였다. 동생과 싸워도 회초리를 맞았고,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회초리를 맞았다. 가는 나뭇가지나 긴 자로 맞을 때는 아프기는 해도 마음의 상처를 덜 받았지만, 뺨을 맞거나 주먹질을 당할 때는 인격이 무너져내렸다. '사랑의 매'로도 불리고 양육의 채찍을 상징하는 회초리도 분명 폭력이다. 회초리와 함께 사랑이 전달되기는 싶지 않다. 회초리가 어떤 원칙도 없이 그것을 드는 사람의 기분과 자의에 의존할수록 매를 맞는 사람은 사랑보다는 폭력을 느낀다. 감정적 손찌검은 그 자체 순전한 폭력이다. 이러한 폭력은 결코 사랑이라는 말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문제는 훈육과 규율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점이다. 규율이 없다면 사회는 존립할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사회가 겉으로는 마치 '규율이 없는 사회'를 향해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는 근본적으로 규율이 없이는 지속할 수 없다. 규율은 질서나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정하여 놓은 행동의 준칙을 의미한다. 규율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뿐만 아니라 개인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인은 자신이 정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통제하고 어려운 일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종의 규율이 필요하다. 규율은 규칙이나 명령을 준수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자제력이다. 그러므로 규율이 없으면 사회 질서도 불가능하고 개인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 사회는 언제나 규율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규율'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낱말의 사용이 거북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규율의 이중성 탓일지도 모른다. 서양에서 규율이라는 단어는 '가르침' 또는 '처벌'로 번역될 수 있는 라틴어 낱말에서 나왔다. 규율은 한편으로 규칙이나 명령을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규칙을 따르지 않을 때 처벌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르침은 개인이 스스로 규칙을 준수하도록 자기 훈련에 초점을 맞추지만, 처벌은 외부적 강제를 통해 순종하도록 만든다.

규칙을 준수하도록 하는 규율은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전자는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기에 부정적으로 여겨진다면, '자기 훈련' 또는 '자기 규율'로 표현되는 후자는 대부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자기 규율(self-discipline)'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처럼 규율은 '순종'과 '자기 훈련'의 두 가지 의미로 구분된다. 자기 훈련은 각 개인의 책임이며 내부 또는 외부의 방해 요인이 우리를 방해하지 않고 목표를 꾸준히 추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에 순종은 외부적으로 설정된 목표를 따르도록 강요한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훈육되고, 군인은 입대할 때 순종을 맹세하고, 신자는 종교 계명에 순종을 서약하며, 계층적으로 조직된 회사의 직원은 상사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규칙을 따르는 순종은 어쩌면 규율의 목적이고 수단이다. 순종이 없다면 질서가 위태로워지는 것처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자기 훈련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폭력적 규율이다. 타인이 나에게 강제하는 규율은 폭력적이지만, 내가 스스로 자신에게 강제하는 규율은 비폭력적이다. 규칙을 따르려면 통제는 필수적이지만, 우리는 통제 방식이 변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사회학자에 따르면 문명화 과정은 '외부적 통제로부터 내부적 통제로의 전환'이라고 한다. 남이 명령하고 강제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알아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바로 문명화된 규율이다. 모든 운동선수가 자발적으로 훈련에 참여하고, 아무런 반발 없이 훈련과정을 소화한다면 문제는 간단할 수 있다. 개인에게 최적화된 훈련 프로그램만 발전시키면 된다.

문제는 현실이 자율적 규제와는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발생한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훈련생을 자율적 규제로 강제할 수 있는가? "듣지 않으려는 자는 느껴야 한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몸으로 직접 고통을 느끼는 폭력적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훈련생이 스스로 느끼도록 만들 것인가? 이 물음의 요청대로 비폭력적 규율에 기반한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아동학대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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