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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7] 수토관의 마지막 여정 〈끝〉

2024-08-07

모진 풍파·정쟁 다 견디고…장군으로 살 수 없게 되자 역사 속으로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7] 수토관의 마지막 여정 〈끝〉
의성 비안면 외곡리 백학산(白鶴山) 동쪽에 자리한 장한상 장군의 묘소. 한평생 충직한 장군으로만 살았던 그는 주검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귀향길에는 백전노장의 주검을 받들기 위해 경종이 보낸 일꾼들이 함께했다. 그 흔한 팻말 하나 없이 잡풀만 무성한 묘소에는 조선 후기 문신 채헌징이 쓴 묘갈명만이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다시, 의성이다. 장한상 장군을 따라 떠났던 우리의 수토(搜討) 기행이 처음 시작된 곳. 그리고 스물하나의 파릇한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이후 한평생 영토를 지키는 무관으로 살며 적군의 야욕이 도사린 험지만을 떠돌아야 했던 장군의 마지막 종착지.

1694년(숙종 20) 왕의 특명으로 울릉도를 수토한 뒤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울릉도 수토관 장한상은 그로부터 무려 30년이 흐른 뒤에야 의성으로 돌아왔다.

향년 69세였다.

"지금 제 나이가 예순일곱입니다. 우리 장한상 장군이 회령 부사에 제수되어 경종 왕으로부터 궁시(弓矢, 활과 화살)를 하사받은 나이죠."

장군의 후손이자 순천 장 씨 대종회장인 장선호씨의 눈길이 순간 아련해졌다. 그도 여전히 은퇴는커녕 생업현장에서 왕성히 활약하는 현역이지만, 조선시대 60대는 지금의 60대와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세에 불과했고, 스트레스 없이 잘 먹고 잘 쉬는 게 일이던 양반의 평균 수명도 55세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하물며, 일터가 곧 전쟁터일 수밖에 없는, 무관 장한상 장군은, 69세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왜, 고향 의성에 돌아올 수 없었던 걸까? 이 질문에는 반드시 무수한 쉼표가 필요하다. 거기엔 우리가 그저 한 줄 문장으로 쉽게 읽어버릴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역사가 있다.

쉼표와 쉼표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장한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쉼표를 찍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확장되는 삶의 지평이 있다.

험난한 울릉 바닷길 마다않고 수토관 부임
당쟁 일삼던 관료들 공격에도 숙종 신임 받아
대기근 땐 도적 평정하고 백성 구휼에 앞장
평생 전장 지키다 69세에 고향 의성서 운명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7] 수토관의 마지막 여정 〈끝〉
장한상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의성 경덕사(景德祠) 유물관. 장시규·장한상 부자 관련 고문서와 각종 유물을 전시해 놓았으나 도둑맞는 일이 잦아 대부분은 의성조문국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장군 장한상, 인간 장한상

"울릉도 수토역사전시관에 갔을 때, 거기 마당에 있던 수토관 명단 비석 보셨죠? 지금까지 80여 명의 수토관이 울릉도에 파견됐는데 그중 이름이 확인된 수토관만 38명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더 기억에 남는 분이 수토관으로 임명되자 곧바로 관직을 버린 분이었어요. 울릉도 수토관으로 가느니 차라리 관직을 내려놓은 거죠. 그 옆에 풍랑에 순직한 수토관 추모비도 함께 세워져 있었잖아요. 나라면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장한상 장군의 묘소 앞에서 장선호 회장의 눈길이 또 한 번 아련해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울릉도로 가는 험난한 바닷길을 용케 헤쳐간다 해도 그곳에서 어떤 왜적을 맞닥뜨릴지, 또 용케 왜적을 물리친다 해도 다시 무사히 육지로 돌아올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임무였다. 당시의 수토관들에게 울릉도는 전략도 병법도 미리 손써볼 길 없는 미지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것도 안용복 사건 이후 일본과의 갈등이 가장 심할 때, 장한상 장군은 그 미지의 세계로 처음 발을 들인 장군이었다.

"돌아보면 울릉도에서 살아 돌아오신 이후에도 한평생 순탄했던 시기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다른 관료들은 정치를 했다면, 장한상 장군은 정치를 할 줄 모르셨죠. 그저 관료로서 백성들을 챙기는 일에만 신경 쓰셨던 것 같아요. 무관으로서 왜적을 토벌하고, 우리 영토를 지키는 일 역시 백성들 삶의 터전을 지키는 일이니까 목숨 걸고 하셨을 테고요."

장군의 그 마음을 동시대의 정치꾼들은 정쟁에 이용했고, 왕은 신임했다. 울릉도 수토 이후 보여지는 장군에 관한 짧은 기록들은 울릉도 수토여정만큼이나 관료로서 그의 삶이 험난했음을 보여준다.

1711년(숙종 37) 장군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북병사 北兵使)로 있던 당시, 왕에게 간언하는 일을 맡은 간원(諫院)들의 공격을 받았다. 국경을 넘어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장한상 장군이 이들에 대한 처벌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결국 파직 당했지만 곧 복직되었다. 국경을 지키는 일에 장군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는 백두산을 둘러싸고 조선과 청나라 간에 국경 문제가 발생했던 시기였다. 장한상 장군은 백두산 남쪽 조사를 맡았고 지형을 그려 조정에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1712년(숙종 38)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고 기록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가 건립되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장군은 조사 결과가 부실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빙설(氷雪)로 뒤덮인 백두산을 구석구석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사헌부는 정죄를 요청했으나 왕은 윤허하지 않았다.

1718년(숙종 44) 영변부사로 부임했을 때도 상인이나 관기와의 친분을 이유로 공격을 받는다. 당시 사헌부는 장한상 장군의 파직을 요청했으나 이 또한 윤허되지 않았다. 1723년(경종 3) 다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을 때는 12년 전인 지난번 재임 시절의 벌목 사건이 다시 거론되었고 역적에게 아첨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이 장군의 삭직을 요구했다. 당쟁 중인 다른 파벌의 인물과 친분이 있다는 것이 역적에게 아첨한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같은 해 장군은 황해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나 이번에도 삼사의 공격을 받아 결국 낙마한다.

이 모든 일은 장군이 50대 중반이던 시절부터 60대 후반까지 불과 10년 남짓한 세월 동안 벌어진 일이다. 왕은 영토와 백성을 지켜야 하는 격전지마다 장한상 장군을 임명했고, 당쟁을 일삼던 관료들은 끊임없이 파직, 삭직 운운하며 공격했다. 이쯤 되면 시쳇말로 더러워서 안 한다는 소리가 절로 날 법도 한데 장한상 장군은 천성이 장군이라 그런지 전장을 피할 줄 몰랐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1713년(숙종 39) 호남에 대기근이 들어 도적떼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장한상 장군이 도적을 평정하고 재해 입은 백성들을 구제하자 당시 지역민들은 살아있는 그의 '사당을 짓고 동비(銅碑)를 세워 송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1716년(숙종 42) 장군이 경기도 수군절도사로 제수되었을 때는 흉년이 들자 강화도의 군량미를 열어 배곯는 백성을 구휼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여느 양반들이라면 '나라 지키는 데 쓸 군량미를 한낱 천한 백성들에게 다 퍼주면서 어찌 나라를 지키겠냐'며 또 파직 운운했겠지만 왕은 알고 있었다. 그 나라를, 왜, 지키는 것인지를. 이것이 장한상 장군이 나랏일을 하는 방식, 영토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역사를 아는 일, 우리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일

"장한상 장군이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네 마네 논란이 일었던 그 시기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죠. 68세에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될 만큼 정정했던 장군은 불과 석 달도 안 돼 갑자기 별세하셨고, 장군의 주검을 고향에 모시던 날 애정 넘치는 제문을 내려주셨던 경종도 같은 해 갑자기 승하하십니다. 왕이 된 지 불과 4년 만이었어요. 한 시대가 끝난 것이지요."

묘소 주변이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그 흔한 새 소리,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장군이 더이상 장군으로 살 수 없을 때, 왕이 총애하던 신하를 잃었을 때, 그들은 그렇게 맥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이것이 이렇게 끝나도 되는 이야기인가? 이렇게 갑.자.기?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일본 외무성이 매년 4월이면 국제정세와 일본 외교활동을 기록한 백서인 외교청서를 발표하는데 '2024 외교청서'에서 올해도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잖아요."

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어떤 옛이야기는 너무 느닷없이 끝나는가 싶다가도 또 어떤 옛이야기는 너무나 오랜 세월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다. 장선호 회장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잡초를 뽑아내고 있다. 장군의 무덤가, 잠시라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무성히 자라나 묘를 잠식해버릴 태세로 쓸데없는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사실 이번 수토기행을 하면서 우리 장한상 장군의 기록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더 똑똑히 알게 됐어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토록 알려지지 않았는지 반성도 하게 됐고요. 일본을 무조건 적대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고요, 비슷한 영토 주권 문제는 시대에 따라 모습만 바꿀 뿐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올해 불거진 '라인(LINE)사태'도 결국 온라인상의 데이터 주권싸움이잖아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이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때 우리 장한상 장군이 결정적 기록을 남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에 맞게 뭔가를 해야죠. 아니, 적어도 장군이 목숨 걸고 지켜낸 것을 우리 후손들이 잃지는 말아야죠."

이놈의 잡풀은 잠시라도 방심하면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자란다면서 그가 비장한 눈길로 나를 보았다.

"우리도 제초하러 좀 가볼까요? 일본에 있다는 그 다케시마 전시관(영토·주권 전시관)으로!"

아. 정녕 다음 기행은 일본인가. 수토기행은 끝났지만, 우리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장한상 장군의 묘갈명(墓碣銘)

"장한상 같은 자가 있으면 대국도 조선 넘볼 수 없다"


조선후기 문신 채헌징(蔡獻徵)이 장한상 장군의 행적과 인적 사항을 정리하여 묘비에 새긴 글이다. 장군의 출생에서부터 무관으로서의 업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울릉도 수토관으로 임명·활약하던 시기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계해년(癸亥年 1683, 숙종9)에 희천(熙川) 군수(郡守) 때는 중국사신(中國使臣)을 접대할 때 기계(奇計·기묘한 꾀)를 많이 설치(設置)하여 그들의 횡포(橫暴)를 막으니, 칙사(勅使)가 놀라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여 탄식하며 말하되 '이 같은 사람이 몇 사람만 있으면 대국(大國)에서도 감히 넘볼 수 없다' 하고 그 뒤에도 사신이 오고갈 때 반드시 그의 안부와 작위(爵位·벼슬과 지위)를 물었다고 한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20)에 울릉도가 왜인(倭人)들이 침범하여 점령당함으로 조정에서 공(公)에게 삼척영장(三陟營將)으로 특명을 내려 심찰(審察·자세히 살핌)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본도(本島)는 해로(海路)가 험악하여 수도(水道)가 불통(不通)하는 때였다. 공은 약로(弱櫓·노)와 고범(孤帆·돛단배)으로 도중(島中)에 직입(直入·곧장 들어감)하여 산천(山川)을 그림으로 그리고 경계(境界)를 확정(確定·틀림없이 정함)해서 왜인으로 하여금 월경(越境)하여 침범(侵犯)하지 못하도록 했고, 이 일을 상주(上奏·임금에게 아룀)하니 왕께서 가상(嘉賞·칭찬하여 기림)하여 영남(嶺南)의 우병사(右兵使)로 임명(任命)했다. -중략-장성(長城)같이 의지하다 대성(大星) 문득 떨어졌네. 공(公)의 시계(視界) 불만(不滿) 없고 나의 사모(思慕) 오히려 여감(餘憾) 있네. 성동(星洞) 뒷산 푸른 언덕 먹구름만 끼었구나. 명(銘)을 지어 전하오니 천년 세월 무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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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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