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마저 작품이 되는…'가을 감성' 바람까지 예술이네
청도 풍각면 호동길에 자리한 목공방 '꿈꾸는 공작소'. 사전 예약을 하면 누구나 목공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상상력 넘치는 다양한 목공예품을 감상할 수 있다. 동화 피노키오에 나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닮은 주인장. |
"이야, 오늘따라 바람이 예술이네!"
청도군의 홍보요원으로 활약 중인 관광택시 기사 외삼촌의 목소리에 어느새 가을이 묻어난다. 이곳은 청도역 앞. 청도 고수리 출신 아버지 옆구리에는 시집이 한 권 끼워져 있고, 새마을운동의 주역이었던 어머니와 외숙모 손에는 화첩이 들려있다. 아, 감이 딱 온다. 오늘 로컬힙 프로젝트의 목적지는 가을 감성 한 스푼이 추가된 예술 힙플레이스다.
"청도하면 예로부터 문화의 도시라 캤다. 이호우, 이영도 시인은 많이 들어봤제? 그 남매 시인이 여기 청도읍 내호동 259번지에서 태어났거든. 그분들이 활동하던 시대만 해도 당시 청도 인구가 13만명이었다."
숫자에 강한 청도박사 외삼촌이 구체적 숫자를 제시하며 첫 신호탄을 쏘아올리자, 드라마 마니아 외숙모가 이에 질세라 불꽃에 기름을 끼얹는다.
"드라마 '모래시계' 알제? 평균 시청률 50%를 기록했던 역대급 드라마. 그 드라마 미술감독이 1천 평이나 되는 갤러리를 연 데도 여기 청도 아이가."
그러자 지역축제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활활 불을 지핀다.
"청도 달집태우기 봤제? 그것도 끝내주는 작품이라 카대? 올 초에 숯 가지고 작품하는 이배 작가가 여기 청도에서 달집태우기 해가지고 베니스비엔날레 가서 전시 했다 아이가!"
청도 예찬론자 넷이 모이자 이곳 청도가 순식간에 K아트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이제, 아버지 차례다.
"아버지, 그래서 오늘 우리 어디 가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꺼내 펼치셨다. 올 5월에 발행된 따끈따끈한 민병도 시인의 초판 시조집이다. 간략한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준다. 시조집의 제목부터가 '청도'다.
고수리 출신 아버지는 시집 꿰차고
새마을운동 주역 어머니 손엔 화첩
외삼촌·외숙모 동행 'K아트 나들이'
갤러리 정원에 앉으면 애틋함 물씬
20대 큐레이터 긍정 에너지도 받아
목공예 체험-도자기 빚기 재미까지
청도 읍성 인근에 위치해 청도 관람 후 도자기 체험하기에 좋은 '마마스핸즈 청도 공방'. 스튜디오 옆으로는 근사한 풍경의 공원을 조성해 체험 후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다. |
◆천지사방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는 민병도 갤러리 '목언예원'
"어머니는 칠십 평생 흙을 파며 사셨다/손에 흙이 묻어야 목에 밥이 넘어간다며/날마다 빈들을 깨워 온몸으로 안았다/원하는 3할 치는 밥을 주고 꽃을 주던/세상과의 이별을 위해/어머니가 흙을 놓자/가만히 흙이 다가와 긴 노고를 감싸주었다/언제나 땀에 젖어 하나도 젖지 않은/누군가의 몸이었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흙이여 너의 몸에선 어머니의 살 내가 난다"(민병도 '흙')
민병도 갤러리의 정원에 앉아, 아버지가 시인의 시조집에 실린 글 '흙'을 읽어주셨다. 시조를 낭독하기 딱 좋은 공간. 민병도 갤러리는 그런 곳이었다.
"참, 바람 좋다. 이런 데 있으니, 이런 글도 나오다 보다."
글을 읽고 나니, 청도 바람결에 어머니의 살 내가 묻어있는 것만 같다. 발 끝에 닿은 흙을 새삼 자꾸 쳐다보게 됐다. 그런 곳이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나무와 흙, 그리고 화백이 심어놓은 풀 한포기, 그 끝에 곱게 피어난 꽃한송이가 애틋해지는 곳. 청도 출신 동양화가이자 시조 시인의 작업실을 겸한 갤러리다. 그러다 보니 정원 곳곳에 시비가 있고, 벽 곳곳에 그림이 걸려있다.
"시집 한 권 다 읽은 기분이다. 책 말고, 고개 들어서 이 금천강 풍경을 좀 봐라."
여기저기 정원을 둘러보고, 갤러리와 카페에 걸린 그림들을 한참 바라보던 아버지가 일어설 채비를 하며 말했다.
청도 주민들에게는 흔히 화가의 이름으로 불리는 민병도 갤러리의 진짜 이름은 '목언예원(木言藝苑)'이다. 나무의 말을 바르게 들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여 사람과 나무가 서로 존중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이름. 올여름이 너무 뜨거웠는지, 이리저리 멋대로 자라난 잡풀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목언예원 안내문의 작은 글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정원은 국립수목원이 선정한 '가보고 싶은 정원100'에 선정된 정원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나무가 전하는 말, 어머니의 내음이 묻은 흙 내가 있다.
민병도 화백의 '목언예원' 정원과 카페 '이에르바'. 목언예원의 정원은 국립수목원이 선정한 '가보고 싶은 정원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
◆MZ세대 큐레이터의 힐링 공간 '랩에쏘 갤러리 이서'
갤러리 이서는 마을 버스 정류장을 조금 지나 마을회관 옆, '이런 곳에 갤러리가 다 있네?' 싶은 곳에 있다. 얼핏 보면 그냥 잘 지어놓은 전원주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주변 환경과 위화감 없이 서 있다.
"마을 안에 갤러리가 있으니까 전시 오픈 행사 하면 이장님도 오시고, 동네 할머니도 오시고 마을 잔치가 되죠. 저는 그게 너무너무 좋더라고요."
20대 MZ 큐레이터 이소원씨의 눈빛이 반짝반짝했다. 뭐든 소원을 말하면 하나쯤은 들어줄 것 같은 긍정 에너지가 온몸에 넘쳐났다. 열정을 담아 작품을 안내할 때는 그 에너지 전체를 사진으로 찰칵 남겨두고 싶은, 말 그대로 '인스타 재질'의 큐레이터다. 현재는 차규선 초대전 'Floral Landscapes'가 펼쳐지고 있는데, 조명의 조도는 물론 작품을 살짝 비껴가는 빛의 각도 하나까지 공들여 조절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어머나, 진짜 여기는 다른 세계네! 꽃밭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는 봄이고 여기는 겨울이네. 사계절이 이 안에 다 있네. 진짜 좋다!"
전시공간 한가운데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 있는데, 큐레이터가 마음껏 앉아서 그림을 봐도 좋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메인 전시실 외 곳곳에도 차규선 화백의 작품이 걸려 있다. 어떤 곳은 거실 느낌도 나고 어떤 곳은 주방 느낌도 나고, 갤러리가 이렇게 친숙해도 되나 싶은 순간이었다.
"여기 와서, 한번 앉아봐라"
아버지가 메인 전시실 옆의 작은 전시공간에 앉아 옆의 의자를 두드렸다.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때, 작품은 또 어떻게 바뀌는가. 그런데! 의자 배치가 참으로 놀라웠다. 작품을 등지고 앉게 만든 구조였다. 화백의 꽃밭을 뒤로 한 채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청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 참 좋다. 이 갤러리를 가꿔가는 사람들, 그 시선이 참 좋다. 그래, 이 공간도 작품이고, 이 시간도 작품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나무 깎는 재미 '꿈꾸는 공작소'
피노키오에 나오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한 10~20년 정도 젊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목공방에서 우리를 맞은 주인장은 딱 제페토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마리오네트가 이런 원리거든요. 간단하게나마 팔도 움직이고 다리도 움직이는 이런 인형을 만들어 볼 수도 있고…"
바람개비의 원리를 이용해서 고래가 헤엄치는 풍경을 연출하는 대형 공예품부터 나뭇잎 모양을 한 숟가락까지, 낡은 건물의 1,2층을 모두 목공방으로 사용하는 이곳은 그야말로 상상력이 넘치는 공간, 꿈의 공간이었다. 목공 체험을 하러 왔는데 그저 관람만 해도 충분히 좋을 만큼, 부모님도 나도 공방 곳곳에 놓인 신기한 장난감에 빠져들었다.
"나는 청도에서 50~60년을 살아도 이런 데는 처음 와본다"
청도 논밭을 한참 지나 마을 깊숙이 자리한 목공소에서 나무 향내 맡으며 사포질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2009년에 청도로 귀촌해서 그림도 그리고 나무도 깎는다는 제페토 할아버지(?) 덕분에 공방을 나설 때는 순식간에 뚝딱, 내 손으로 만든 나무 도마 하나씩이 들려있었다. 모든 것이 마법 같은 공간. 아마도 밤이 되면 이 공방 안의 모든 나무 인형들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건물 자체가 작품인 '랩에쏘 갤러리 이서'. 갤러리 옆으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카페도 있다. 이곳의 의자들은 대부분 창을 향해 놓여 있는 게 특징인데, 작품을 감상한 후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과 함께 작품의 여운을 음미하는 맛이 좋다. 현재 진행 중인 차규선 초대전은 9월30일까지 열린다. |
◆고운 물감 붓결에 차와 음식을 담다 '마마스핸즈'
"못 그려도 돼요, 삐뚤빼뚤해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이잖아요. 나중에 유약 칠해서 가마에 구워내면 다른 어떤 그릇들보다 더 멋질 걸요?"
이곳은 청도 읍성 인근에 위치해 청도 관람 후 도자기 체험하기에 좋은 '마마스핸즈 청도 공방'. 아이들 정서 치료를 위해 단체 강습을 하기도 하고 노인복지재단과 함께 어르신들 수업도 하는 강사 선생님은 너무나 친근하고 다정하게 우리를 맞아줬다.
"청도읍성에 가까이 있으니까 여기 관광 오셨다가 들르시는 분들도 많아요. 청도에 와서 오늘을 기억할 만한 작품을 가져갈 수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2년 전 귀촌해서 이곳에서 유화를 그리면서 도자기 체험강습을 하는 김정화씨는 그림 그리랴, 도자기 수업하랴 바쁜 와중에도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돕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림에 집중하는 시간도 좋고, 또 다 만들어놓고 나면 성취감도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 수업은 아무리 바빠도 꾸준히 하는 편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사이, 이웃이 만들고 있는 정원을 함께 구상하는 이야기, 유화 전시회 이야기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도 그림 그리는 재미 못지 않다.
"봤제? 이런 게 청도 예술이다.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예술인 기라"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청도군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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