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출신 이경란 작가 소설집
'크리놀린' 등 모두 8편 담겨
존재의 면면 밀도 있게 펼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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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사막과 럭비'를 펴낸 이경란 소설가. 모두 8편이 담긴 이번 소설집에서는 다양한 사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면면들을 새롭게 드러낸다. 〈영남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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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란 지음/강/264쪽/1만4천원 |
'사물'을 통해 존재의 면면을 펼쳐내는 대구 출신 소설가 이경란의 소설집이다. '다정 모를 세계' '크리놀린' '다섯 개의 예각' 등 모두 8편을 담았다. 사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밀도 있게 끌어가는 특유의 작법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이번 소설에도 다양한 사물이 등장한다. 문밖에 오랫동안 놓여진 택배상자는 인물의 부재를 암시하고, 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해 고안된 크리놀린은 억압과 족쇄를 상징한다. 특히 이경란의 소설 속에서 사물은 단순히 작품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전선이 잘려 나간 청소기와 푹 꺼진 소파는 인물들의 갈등과 권태로운 일상을 짐작케 하면서 서사의 중심에 있다. 그러면서 얽혀있는 관계성을 회복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된다.
'다정 모를 세계'는 무관심과 권태에 빠진 부부의 현실을 다룬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남편에 의해 전선이 잘려 나간 유선 청소기, 두 사람이 앉기에는 너무 큰 식탁, 푹 꺼진 아이보리색 소파, 무엇보다 남편이 쩝쩝거리며 음식 씹는 소리를 녹음한 파일 등은 부부의 관계를 드러내는 사물들이다. 언뜻 사물들은 인물들의 관계를 투영하는 매개체로만 보인다. 하지만 쩝쩝거리며 음식을 씹는 남편의 불쾌한 소리가 '녹음파일'이라는 사물이 되면서 경직된 거부감은 사그라지고 관계성은 회복된다.
'크리놀린'은 억압적 현실을 폭로하고 족쇄를 스스로 풀어내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크리놀린'은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유행한 스커트 버팀대로, 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크리놀린이 여성을 가두는 족쇄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크리놀린 역시 서사의 중심에 선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여인'은 스커트 안에 "강철 테를 연결시켜 만든 새장 모양의 구식 크리놀린"을 착용하고 있다. 때문에 "여인의 몸집은 상대적으로 작아져 초라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런 '여인'이 스커트를 들어서 옮기는 모습을 본 사내는 "꼭 새장에 갇힌 새"같다며 여성을 새장에 갇힌 새에 비유한다. 소설은 여성의 각성을 통해 사물이 인간 주체를 어떻게 움직이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지, 때로는 위협하고 각성시키는지 보여준다.
'못 한 일'에도 다양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미싱, 검정 레자 미니스커트, 죽은 새 등이 서사를 끌어간다. 소설은 주인공 선아씨가 새의 사체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새의 사체는 옷 수선집을 하면서 간신히 살아가는 선아씨의 고통스러운 현재를 보여준다. 특히 환기조차 되지 않은 의류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경자 언니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미싱사가 되어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들처럼 가죽 미니스커트를 입고 싶었던 경자 언니는, 공장에서 쫓겨난 뒤 죽은 새처럼 버려지듯 죽는다. 소설 속에서 먼지 나는 옷 무더기, 끊임없이 밟아야 하는 미싱은 어린 여공들의 신체와 부딪히면서, 죽은 새와 같은 사물이 된다.
신진경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이경란의 소설 속 사물들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면서 인물의 다양한 감정과 욕망을 일으킨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대변하는 매개물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감정과 성격, 심지어 정체성까지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행위자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대구에서 태어난 이경란 소설가는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다섯 개의 예각'과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디어 마이 송골매'가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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