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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오의 한국현재사] 대구 10월항쟁을 기억하는 법

2024-10-18

대구 10월 항쟁의 진실
친일경찰 맞선 민중의 분노
피해자의 목소리 되새기며…
올바른 역사평가의 출발은
바로 피해지역서 시작해야

[주진오의 한국현재사] 대구 10월항쟁을 기억하는 법 대구는 한때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정부 수립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도 진보 성향이 두드러졌어요. 1954년의 3대 총선에서, 전국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였던 자유당이 과반수를 차지했어요. 하지만 대구에서는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습니다.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는 전국 70%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는데요. 진보 정치인 조봉암 후보에게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낸 곳이 바로 대구였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무소속 후보에게 유권자 72.3%가 투표했어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기원은, 아마도 대구 10월 항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경찰에게 탈취한 무기를 지니고 공격하는 군중을 미군과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폭력 행위와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1946년 10월 1일 아침부터 노동자들이 집결하였고, 대구부 청사에는 시민 천여 명이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치며 현관과 유리창을 파괴했어요. 오후에는 늘어난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자, 마침내 경찰은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2명이 사망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시위가 격화되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자, 대구경찰서장은 경찰 병력을 철수시켰어요. 경찰서에 무혈 입성한 시위대는, 유치장 수감자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대구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미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를 동원하여 진압했지요.

이렇게 대구의 시위가 미군정에 의해 진압되자 시위는 경북 일대로 확산되었습니다. 달성, 칠곡, 고령, 성주, 김천, 영주, 선산 등 19개 군으로 파급된 경북의 10월 항쟁은 6일까지 지속되었는데요. 당시 대구·경북 인구 317만여 명 가운데, 77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미군정의 식량 공출과 친일 경찰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었어요. 친일 경찰들이 미곡을 강제 공출하는 데 대한 분노가 쌓여 갔습니다. 그러다 콜레라가 발생하자 방역을 명목으로 대구를 봉쇄하여 식량난에 빠졌고 굶어 죽는 이가 속출했습니다.

경찰 내부와 정치권에서 친일경찰 청산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철저히 묵살되었어요. 오히려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은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그 후에 항쟁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에 강제 가입되어 사찰대상이 되었어요.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예비구금되어, 재판도 없이 집단으로 학살되었습니다. 약 3천500명의 민간인이 대구와 경산 등에서 희생되었다고 하지요.

그동안 폭동에서 사건으로, 나아가 항쟁으로 명칭을 수정해 나가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 결과 2010년 진화위 보고서에 이어, 2016년 8월에 대구 시의회는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는데 이르렀습니다.

11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사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 10월항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침묵과 망각을 강요당해 왔어요. 역사 교과서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습니다. 올바른 역사적 평가의 출발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피해지역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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