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아 시인·경영학 박사 |
언제부터인가 '짤'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졌다. 이는 인터넷에서 돌고 도는 각종 자투리 이미지 파일을 의미하며, '짤방'을 줄인 말이다. 이후 연예인들 사이에 "영상이 짤로 돌아다닌다"는 말이 인기를 얻으면서 '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짤'을 만드는 일을 '짤 생산' 또는 '찌다'라고 하며, '짤'을 주워가는 행위를 '짤줍' '짤'을 만드는 사람을 '짤쟁이'라고 부른다.
'짤'은 매우 즉각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단 몇 초 만에 서로의 공감을 끌어낸다. 때로 표현이 비격식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빠른 정보 패턴이다. 이는 긴 글이 외면받는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트렌드를 입은 것일까. 와중에 선배 두 분이 짧은 시를 엮어 시집을 출간했다. 시는 깊은 서정을 담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농축하여 진액으로 만들어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서동요를 이해하면 시를 읽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데 서동요가 왜 거기서 나오는가 싶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짧고 간결한 시적 표현으로 여백을 주고, 4행시의 함축적 울림으로 급변하는 시대를 위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시가 '짤' 문화와 어딘가 맞닿아 있는 듯하여 매력적이지만, 필자로서는 여전히 그러한 결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집을 펼쳐보니 시가 참으로 괜찮더란 이야기다. 단순함 속에서도 삶의 깊이를 건드리는 짧은 시는 하나의 미학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적이지 않은가.
이제 '짤'이라는 형식은 그 어떤 분야에서든 스스럼없이 녹아드는 것 같다. 여기에, 짤을 돕기 위한 신조어의 활약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필자에게 누군가 "맵찔이네요"라고 한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찌질이'의 줄임말이라는데, 묘하게도 금방 익숙해져 버린다. 그러나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처럼 알 수 없는 신조어들을 앞세우고 '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만 짤쟁이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실에서는 오히려 서동요를 더욱 열정적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잃어버린 별자리를 찾아 헤매는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니까.
고경아<시인·경영학 박사〉
'짤'은 매우 즉각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단 몇 초 만에 서로의 공감을 끌어낸다. 때로 표현이 비격식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중요한 메시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빠른 정보 패턴이다. 이는 긴 글이 외면받는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트렌드를 입은 것일까. 와중에 선배 두 분이 짧은 시를 엮어 시집을 출간했다. 시는 깊은 서정을 담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농축하여 진액으로 만들어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거기다 서동요를 이해하면 시를 읽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데 서동요가 왜 거기서 나오는가 싶지만, 굳이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짧고 간결한 시적 표현으로 여백을 주고, 4행시의 함축적 울림으로 급변하는 시대를 위로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시가 '짤' 문화와 어딘가 맞닿아 있는 듯하여 매력적이지만, 필자로서는 여전히 그러한 결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집을 펼쳐보니 시가 참으로 괜찮더란 이야기다. 단순함 속에서도 삶의 깊이를 건드리는 짧은 시는 하나의 미학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적이지 않은가.
이제 '짤'이라는 형식은 그 어떤 분야에서든 스스럼없이 녹아드는 것 같다. 여기에, 짤을 돕기 위한 신조어의 활약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필자에게 누군가 "맵찔이네요"라고 한다. '매운 것을 못 먹는 찌질이'의 줄임말이라는데, 묘하게도 금방 익숙해져 버린다. 그러나 적잖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처럼 알 수 없는 신조어들을 앞세우고 '짤'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만 짤쟁이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는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면밀히 따져보아야 할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현실에서는 오히려 서동요를 더욱 열정적으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잃어버린 별자리를 찾아 헤매는 일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을 거니까.
고경아<시인·경영학 박사〉
최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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