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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낸 구상 시인(상)…피란문단을 이끌다

2024-12-26 10:23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낸 구상 시인(상)…피란문단을 이끌다
구상 시인.영남일보 DB

1998년 어느 여름 저녁. 외출 중이던 구상 시인은 후진하던 차량에 받혀 다리 골절상을 입고 만다. 단순한 교통사고였다. 하지만 팔순의 시인에게 사고는 치명적이었다. 합병증이 겹쳐 평소 지병이었던 천식이 도지고 말았다. 그 길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입에는 호흡기가 채워졌고, 말은 호흡기에 막혀 입 속에서 맴돌았다. 유일한 의사소통은 필담(筆談)뿐이었다. 연필을 쥐어주면 시인은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병세는 갈수록 악화됐고,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던 그날, 시인은 병원 복도에서 다시 펜을 찾았다. 가족들은 급한대로 작은 메모지와 볼펜을 손에 쥐어주었다. 시인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글을 써내려갔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펜을 놓은 시인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주위 사람들을 죽 한번 둘러봤다. 그리고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이후 시인은 다행히 병세가 호전돼 여섯 해를 더 살다 생을 마감했다. 2004년 세상을 뜰 때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 98년 그해 여름날 병원복도에서 남긴 메시지는 시인의 마지막 유언이나 다름없었다.

시인 구상(具常, 1919~2004). 현대 한국시단(韓國詩壇)의 거목이다. '삶을 노래하는 구도자'로 불린다. 평생을 기독교적 존재관으로 살아온 그는 시를 통해 견고한 구도의 삶을 이어갔다.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이면서 1999년과 2000년 노벨문학상 본심 후보에 올랐던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돼 아직도 널리 읽히고 있다. 그는 시인이면서 필봉을 꺾지 않는 강직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할 당시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기도 했다.

◆필화 사건으로 월남


구상 시인은 1919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형이 신부가 될 만큼 믿음이 깊은 가톨릭 집안이었다. 시인이 네 살 때 그의 가족은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리로 이사하게 된다. 부친이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 사업을 맡으면서였다.

열다섯 살 때는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베네딕도 수도원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3년 만에 환속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종교과에 입학해 불교·기독교 등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며 정신적 근원을 다졌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서구의 급진사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1941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와 북한 함흥에서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했다. 또한 원산에서 만난 여의사 서영옥과 결혼한다. 그즈음 그에게는 평생의 지병이었던 폐결핵이 찾아왔다. 그리고 광복. 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그는 뜻하지 않은 필화사건을 겪어야 했다. 당시 구상 시인은 '원산문학가동맹' 동인으로 활동 중이었다. 그는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이 광복을 기념해 펴낸 시집 '응향(凝香)'에 '여명도(黎明圖)' '길' '밤' 등의 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47년 '응향'에 발표한 작품을 두고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규탄의 대상이 됐다. 작품의 내용이 퇴폐적, 악마적, 부르주아적, 반역사적, 반인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날선 비판은 갈수록 거세졌고, 급기야 반동작가로 몰리게 된다. 시인은 결국 그해 2월 월남한다. 그리고 1950년 6월25일,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일어난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낸 구상 시인(상)…피란문단을 이끌다
종군작가 활동중 양명문 등과 함께한 구상 시인(왼쪽 첫번째). <영남일보 DB>

◆ 대구와 인연…피란문인들의 든든한 후원자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문단은 비상체제로 편성됐다. 곧장 임시수도인 대전에 집결해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 이하 문총)'를 결성했다. 구상 시인 역시 문총의 단원으로 참여한다. 전세는 갈수록 악화됐다. 결국 문총은 피란길에 나서야 했고, 밀리고 밀려 둥지를 튼 곳이 바로 대구였다.

구상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문총의 단원이면서 당시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주간으로 일했던 시인 역시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전쟁의 참화를 몸소 받아들이며 펜을 들었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종군했다.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문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피란문단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1·4후퇴를 전후해서는 영남일보에 피란 보따리를 풀었다. 구상 시인은 영남일보의 배려로 아예 신문사에 집무실을 꾸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격동의 시절, 대구 중구 북성로와 향촌동 일대는 문인들의 안식처였다. 살아있음을 인식하기 위해,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을 달래기 위해, 문인들은 향촌동으로 향했다. 그들이 드나들던 다방과 술집에는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으며 문학과 예술이 꽃을 피웠다.

구상 시인은 당시 향촌동을 넉넉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문인들은 무시로 외상술을 마셨고, 시인은 그들을 대신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외상값을 갚아 주었다. '구상'이라는 이름 두 자를 쓴 종이 한 장이면 술집을 무상으로 드나들 만큼 명망과 신용을 갖춘 인물이었다. 피란문인들은 시인을 '향촌동의 귀공자' '향촌동의 백작'으로 불렀다.

특히 그는 청년 문학도들에게 너그러웠다. 구상 시인이 자주 들르던 향촌동의 술집 '대지바'에서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날이면, 향촌동 골목길을 표류하던 청년 문학도들은 넉넉한 술잔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 지낸 구상 시인(상)…피란문단을 이끌다
젊은 시절의 구상 시인. 6·25전쟁 당시 대구와 인연을 맺은 시인은 피란문인들과 교류하며 그들과 동고동락했다. <향촌문화관 제공>

◆ 초토의 시, 그리고 꽃자리다방

 


전쟁 당시 대구에 머물면서 구상 시인은 시대의 참화를 기록해 나갔다. 그의 대표작 '초토의 시'는 시인이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몸소 받아들이며 쓴 작품이다. '초토(焦土)'는 '까맣게 탄 흙이나 땅'을 일컫는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시적 상황이 집약되어 있다. 폐허 속에서도 끝내 놓칠 수 없는 인간적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견지하는 구상 시인 특유의 시세계가 잘 드러난다.

15편의 연작시로 구성된 '초토의 시'는 1956년 청구문화사에서 시집으로 출간됐다. 출판 기념회는 대구 중구 북성로 107(북성로 1가 17-2)에 자리한 건물 2층, 피란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꽃자리다방에서 열렸다. 시집의 표지화는 구상 시인과 각별했던 화가 이중섭이 그렸다.

당시 출판기념회를 찾은 공초(空超) 오상순은 자신이 주인공인 양 말끔히 차려입고 나타나 시선을 끌었다. 하루에 담배 스무 갑을 피울 정도로 애연가였던 오상순 역시 구상 시인과 막역한 사이였다. 구상 시인은 오상순이 평소 인사말로 건네던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에서 영감을 얻어 '꽃자리'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시인은 휴전 협정이 있었던 1953년 대구에서 가까운 칠곡 왜관에 집을 마련해 정착했다. 집 터에는 그의 부인이 운영하던 '순심의원'과 살림채가 붙은 양옥 한 채, 문간채로 세를 주던 한옥 한 채, 그가 사랑채로 쓰던 한옥 한 채가 있었다. 1974년 서울로 이사 가기 전까지 시인은 낙동강변을 거닐고, 수도원 농장에서 밭일하고, 시를 썼다. 그렇게 그의 연작시 '밭 일기' 100편과 '강' 60여 편이 세상에 나왔다. 서울에서 태어나 함경도에서 자랐지만 그의 본적은 '경북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9'다. 그가 살았던 왜관에는 현재 구상문학관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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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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