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
전문용어 동원 안심시키고
불안 섞어 정상적 판단 마비
한 순간 사기벨트 부품 전락
누구든 걸리면 마취될 수 있어
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
카드 배송 기사의 전화 한 통이 시발(始發)이다. 신청한 적 없다. 여기 적혀 있는 카드 회사에 전화해 봐라. 이미 털린 뒤에 이런 사기 수법이 빈발하여 SNS에서조차 주의하라는 메시지가 돌아다녔음을 알았다. 명의 도용된 모양이다. 당신 자산 보호를 위해서 조치가 필요한데, 카드 회사에서는 어렵고 금융감독원에 문의해 봐라. 사이트에서 찾은 금융감독원 대표 번호로 전화하니, 자세하게 전문적인 절차와 단계를 하나씩 설명해 준다. 처음 듣는 전문적인 단어와 절차에 빠져들었다. 자산 보호 신청이 거부되었다. 사건 연루되어 수사 중인 사안이다. 서울중앙지검에 사건 번호를 제시하고 담당 검사에게 알아봐라. 내 전화기를 해킹해서 대표 번호도 범인이 받았음을 까맣게 몰랐다.
사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내일 구속영장 집행하려는데 어떻게 미리 알았어? 고위직에 아는 사람 있어? 현재 위치에 꼼짝 말고 대기해, 금융감독원에서 알려주었다고 하니, 알려준 사람도 현 위치에 대기하라 그래. 그러고는 전화를 뚝 끊는다. 말할 시간도 정신 차릴 시간도 주지 않는다. 선생님 때문에 나도 대기해야 하나? 약식으로 조사해 달라고 부탁해라. 당신 금감원 그 친구 잘 아는 사이야? 당신 혐의가 있으면 자기가 처벌받겠다는 의견서까지 첨부했네. 금융 사건은 금감원과 공조 수사를 많이 하니까, 지금부터는 나하고 통화할 일 없고 금감원 친구가 알려주는 대로 해. 담당 검사 공문 받았다. 보안 서약하고 금감원 들어와서 몇 가지 절차를 거쳐 관련 서류를 제출하면 피해자로 전환해 준다고 했다. 보안 사건 유념해라. 내일 금감원 올 수 있도록 출입 허가증 신청하겠다. 출입이 불허되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담당 검사에게 알리고 나는 빠지겠다. 뭐야, 협조해 준다더니 금감원 친구는 그만둔다고 하고, 진작 들어와 조사받았으면 끝날 일을, 할 수 없지, 당신 죄지은 것 없잖아? 47명이나 되는 피해자들한테 나도 할 말은 있어야지. 그러면 형사 공탁금을 걸고 피해자로 전환하는 방법밖에 없겠네. 공탁금이 피해액이다. 피해 신고를 위해 찾은 경찰서 형사는 자책하는 나에게 전문직 직군도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며 위로한다. 뒤처리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피해자의 불안감을 극도로 증폭시키고, 한쪽에서는 전문적인 용어를 동원해서 안심시키고, 범인들은 불안감과 안도감을 교묘하게 섞어서 정상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마취제로 썼다. 나도 모르는 순간 그들의 사기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무장 해제되는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벨트가 멈추자 '스스로 나를 부수어 그들을 돕는 일을 했구나'를 뒤늦게 깨달았다.
정부에서도 최선을 다해서 예방 시스템을 만들고, 범인 검거하고, 홍보하고 있지만,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우리도, 모르는 전화 안 받고, 회신은 수신 전화와 다른 유선 전화기로 하고, 보안 강조하면 의심하자. 누구든 걸리면 다 마취될 수 있다.박정곤 대구행복한미래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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