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맹방해변에서 바라본 덕봉산. 덕봉산을 지나면 덕산해변이 나온다. |
영화 '봄날은 간다' 촬영지 묵호 도착
은수·상우 흔적 따라 설레는 여행 시작
뚜벅이라면 '삼척관광택시' 예약 추천
4만원 내면 4시간 동안 편하게 이동
최적의 코스 안내·맛깔난 해설은 덤
삼본아파트·죽서루·신흥사 등 둘러봐
어떤 여행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수십 번 떠올려보게 된다. 동해와 삼척. 영화 '봄날은 간다'(2001)의 촬영지가 된 이곳들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극 중 은수(이영애)와 상우(유지태)가 절절한 사랑을 그렸다. 이 낭만이 깃든 곳들을 언젠가 방문해보리라. 하지만 여행자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대구에서 떠나는 열차는 하루에 단 두 편뿐. 떠나는 길은 멀고, 돌아오는 길은 더 막막했다.
지난 1일 개통된 동해중부선은 지난 시간의 고민을 말끔히 지워냈다. 이제 동해와 삼척은 대구에서 세 시간, 포항에서 두 시간이면 충분히 간다. 출발 시간의 선택지도 많아졌다. 발을 뗐다. 그렇게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동대구역에서 동해에 위치한 묵호역으로 간다. 4일 오전에 출발하는 열차는 모두 매진. 오후에 출발하는 차편은 자리가 있었지만 시간이 애매했다. 포항역은 운행 시간이 보다 다양했다. 동대구역에서 포항역을 거쳤다 동해선을 타기로 한다. 오후 3시20분에 오는 ITX-마음을 탑승한다. 오후 5시29분 묵호역 도착. 2시간9분이 소요된다. 부전역(부산)에서 출발해 태화강-경주-포항-영덕-울진-삼척-동해 등을 거쳐 강릉까지 하루 8회 운행하는 노선이다. 부산에서 강릉까지는 약 4시간50분이 걸린다고.
열차가 오기 15분 전부터 역 승강장은 분주했다. 가족, 연인, 친구 등 승객 단위도 다양했다. 한 시민은 "강원도에 가는 열차를 드디어 타보네"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열차가 들어서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줄지어 터졌다. 온몸에 빨간색 분을 발라 예쁘게 치장한 열차는 환호를 쏟아내기 충분했다. "와! 새 기차다!" 아이들도 탄성을 터트렸다. 새 열차답게 내부도 쾌적했다. 열차 안엔 대구경북 시민들은 물론 부산·울산에서 온 승객도 많았다. 부산에서 강릉까지 간다는 50대 박모씨는 "예전부터 강원지역 바다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지만 워낙 가기 힘들어 궁금증으로만 남아 있었다. 부산에서 바로 갈 수 있는 열차가 개통됐다는 소식을 듣고 강릉 바다의 일출을 보러 간다"고 말했다. 동해선의 매력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다 풍경과 다양한 도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창밖으로 월포, 고래불, 울진 등 동해 바다가 펼쳐진다. 특히 동쪽 창측 좌석인 D석에선 오션뷰를 더욱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정차역이 많아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도시의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동해의 묵호역에서 내린다. 예상 소요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별칭을 지닌 묵호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작은 어촌이었던 묵호는 1937년 묵호항이 개항하고 동해안 제1의 무역항이 되면서 발전한 마을이다. 지명은 강릉 부사 이유응이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말기 오이진에 큰 수해가 나자 이유응은 현장을 시찰했다. 이 포구는 검은 새와 바위가 많아서 오이진으로, 이웃 마을은 청주한씨가 많이 산다고 하여 발한(發韓)이라 불렸다. 이에 이유응은 선비들이 많이 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의 발한(發翰)으로 고쳐줬다. 오이진에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곳에서 멋진 경치를 보며 좋은 글씨를 쓰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의 묵호(墨湖)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논골담길 정상에서 바라본 묵호항 인근 마을 전경. |
등대에서 더 걸어 올라가면 영화 '봄날은 간다' 명장면의 배경이 된 작은 아파트가 나온다. 영화는 강릉과 삼척, 정선 등 강원지역 여러 곳에서 촬영됐지만 결정적인 장면은 이곳 '삼본아파트'다. 여주인공 은수가 사는 아파트였기 때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은수와 상우가 사랑을 시작한 곳도, 끝낸 곳도 여기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지만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아련하다. 아파트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은 어딘가 덧없는 느낌을 준다.
사랑이 변하는 걸까, 사람이 변하는 걸까. 내가 은수였다면, 혹은 상우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련함에 취해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 정신을 차린다. 삼척으로 가는 기차 시간이 다가온다. 이곳으로 오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짧지 않다. 택시를 잡아 묵호역으로 발을 뗀다. 29분이면 도착하는 누리로 열차를 탄다. 동쪽 창측 좌석에 앉아 동해 바다를 보며 멍 때린다. 이렇게 '물멍'을 때리다 보면 금세 삼척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뚜벅이에게 삼척 여행은 특히 고민이 많았다. 어떤 곳은 시가지 인근에, 어떤 곳은 해변에, 어떤 곳은 국도를 타고 외곽으로 나가야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시간과 기동력이 걸렸다. 택시를 이용하기엔 비용적 부담이 컸다. 어떡하지. 챗GPT에 물으니 '삼척관광택시'라는 제도를 알려줬다. 8만원이면 4시간 동안 편리하게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다고. 삼척시에서 절반을 지원하기 때문에 승객은 4만원만 내면 된다. 여행 이틀 전 온라인을 통해 예약하니 바로 배정 문자가 날아왔다.
역 앞에서 예약해둔 삼척관광택시에 탑승한다. 서글한 인상의 기사가 반겨준다. 죽서루로 가달라 하니 신속하고 안전하게 이동해준다. 25년 동안 삼척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재치있고 맛깔난 입담으로 삼척 관광에 대해 해설해준다. 최적의 코스를 안내해주는 건 덤이다.
2023년 12월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삼척 죽서루. |
동해 논골담길 정상 인근에 위치한 삼본아파트. 영화 봄날은 간다의 촬영지다. |
12세기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죽서루(竹西樓)는 오십천변 자연 암반을 그대로 사용해 건축한 누각이다. 관동팔경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는데 죽서루만 오십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고. 고려~조선시대 명인의 시문 200수가 남아 있다. 특히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죽서루를 크게 찬양해 우측엔 '송강 정철의 가사터'라는 시비가 서 있다. 이런 가치로 2023년 12월28일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됐다. 오십천 건너편 정자 전망대로 가면 특히 주변 풍광이 잘 보인다. 삼척 시내를 지나 7번 국도를 따라 25분 정도 달리면 신흥사가 나온다. 천년사찰인 신흥사는 신라 진성여왕때 동해에 처음 지어졌다 조선 현종때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외곽에 위치한 고즈넉한 사찰은 봄날은 간다에서 은수와 상우가 사랑의 신호를 감지한 곳이다. 영화 초반 두 사람은 라디오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여기서 작업을 마친 뒤 상우는 강릉에 위치한 집으로 은수를 바래다준다. 그 집이 앞서 들린 삼본아파트다. 영화를 만든 허진호 감독은 2017년 이곳을 다시 찾아 '신흥사에 다시 오니 좋습니다'란 글귀와 함께 친필 서명을 남기고 갔다.
일몰을 보기 위해 해변으로 향한다. 택시기사의 추천으로 도착한 덕산해변은 외딴 섬 같은 낮은 산을 끼고 있었다. 덕봉산이다. 정상에서 보는 일출이 그렇게 절경이라고 한다. 덕봉산 옆에 조성된 다리를 따라 걸으면 바로 옆에 위치한 맹방해변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일몰 시간을 기다리는데 웬걸. 시간이 지나도 해가 나오지 않는다. 흐린 날씨 탓에 어두워지는 뿌연 하늘만 보일 뿐이다. 조금 아쉽지만 아무렴 어떤가. 대구에서 삼척까지 온 것만으로도 행운인데.
글·사진=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