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2인자' 삼성 비서실장, 계열사 설립 주도 막강한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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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삼성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이병철은 1년에 단 한 번, 연말에 사장단 전체회의를 가졌다. <삼성그룹 제공> |
1973년 초 일본의 대무역상사인 이토추(伊藤忠)의 회장이었던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건너오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과 세지마 류조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선후배 관계로 박정희가 세지마 류조보다 2년 후배였다.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세지마 류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본영의 정보 참모로 일했던 일본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세지마 류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시베리아 포로 수용소에서 11년간 강제 노동을 하다가 1956년 11년 만에 석방됐다.
귀국 직후 그는 1958년부터 일본의 군소섬유업체였던 이토추에 업무부장으로 입사한 후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부사장, 부회장을 거쳐 1978년에는 회장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세지마 류조는 그 기간 작은 섬유업체였던 이토추를 일본 3대의 무역상사로까지 발전시켰다. 1970년대 일본이 수출로써 세계경제를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역상사의 맹활약 때문이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세지마 류조를 만났던 것은 어떻게 하면 한국이 100억달러 수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1인당 GNP 1천달러를 달성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때 세지마 류조는 한국은 부존자원이 없는 국가이므로 오로지 수출을 통해서만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면서 종합무역상사를 설립하여 수출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비서실을 만들 때 벤치마킹한 일본의 종합무역상사는 미쓰비시와 미쓰이, 스미토모, 이토추 등 일본 굴지의 재벌그룹 비서실이었다.
이렇게 해서 1970년대 후반에 다시 태어난 삼성그룹 비서실은 정보수집, 기획, 기획조사, 재무, 정보시스템, 경영관리, 인사, 감사, 국제금융, 홍보, 기술 등 폭넓은 방면에서 이병철 회장을 보좌하게 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삼성 비서실은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직장이었으며, 실제로 그곳엔 한국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이 모여 삼성을 이끌어 나갔다.
일본 굴지의 종합무역상사 벤치마킹
70년대 후반부터 정보수집·기획 맡아
국내 최고 엘리트 모인 조직 재탄생
연말 단 한차례 열리는 '사장단회의'
비서실 준비 자료로 새해 계획 논해
초일류 삼성 컨트롤 타워 자리매김
◆삼성 비서실의 역사
초대 비서실장엔 이석우씨가 취임했다. 당시의 비서실은 삼성물산 내에 있는 과조직 중의 하나였으며 출범 당시의 인원도 20여 명에 불과했다. 제일모직 총무과장을 지낸 이석우씨는 약 2년6개월간 비서실장을 하면서 의전과 은행관리, 문서작성 등의 일을 관장했다. 이어 1961년 11월에 제2대 비서실장으로 박태서씨가 취임했고, 1966년 10월8일에는 제3대 비서실장으로 이만우씨, 1967년 2월에는 이보영 실장이, 그 해 12월에는 이진석 실장, 1970년 1월에는 다시 이석우 비서실장 등이 비서실을 책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성의 비서실은 주로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1970년대에 들어 비서실은 다시 태어난다. 일상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비서실이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라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재탄생한 삼성그룹 비서실의 초대 비서실장은 송세창(당시 38세)이었다. 송세창은 1971년 10월25일 비서실장에 취임한 후 1977년까지 비서실장을 지냈는데, 그는 이병철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했다. 송세창은 비서실장으로 재임하면서 제일합섬, 호텔신라, 삼성전기, 삼성중공업,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어 1978년에 비서실장에 취임한 소병해씨는 1990년까지 무려 12년 동안 비서실장을 지냈는데 그도 일을 신속·과감하게 추진했다. 소병해도 삼성전관, 삼성코닝, 삼성항공 등을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나갔다. 소병해는 비서실을 맡아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했고,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삼성그룹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그만큼 일도 잘했다.
그러나 비서실 권력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폐해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그룹의 비서실은 이건희 시대에도 그 위력을 발휘했다. 이학수 비서실장은 삼성그룹의 2인자로서 이건희 회장을 보필했다. 그 역시 뛰어난 분석력으로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그 전통은 지금의 이재용 회장 시절에도 정현호 비서실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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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해외사업추진위원회에 참석한 이건희(왼쪽 둘째) 회장이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삼성그룹 제공> |
1982년 12월15일 삼성그룹 빌딩 28층 대회의실. 약 150평의 넓은 회의실에는 이건희 부회장,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 조우동 삼성조선 회장 등 회장단이 속속 들어와 회장단석에 자리를 잡았고, 중앙 테이블 양쪽에는 사장단들이 도열했다. 경주현 삼성물산 사장, 이수빈 제일제당 사장, 김인호 전주제지 대표이사 등이 그들이었다. 사장단이 앉는 순서는 회사의 창업 순서대로였다. 사장단 후열에는 소병해 비서실장 등 4명의 비서실 임원이 배석했다. 평소 넥타이를 매지 않고 콤비를 즐겨 입던 이병철 회장이 이날은 감색 싱글의 정장 차림으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바로 이날은 삼성그룹의 내년 한 해를 결산하고 새해의 사업계획을 짜는 날이었다. 이병철은 비서실에서 만든 자료를 토대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른바 '어전회의'였다. 이병철은 1년에 단 한 번, 연말에 바로 이와 같은 사장단 전체회의를 가졌다. 사장단들이 차례로 나와 브리핑했다. 이병철은 브리핑을 하는 중간중간에 간간이 질문을 던지며 사장의 답을 들었고, 그 자리에서 지시를 내렸다. 워낙 목소리가 작은 데다 나지막하고, 경상도 사투리마저 심해 사장단들은 잔뜩 긴장하지 않으면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계열사 사장들은 모두 돌아가면서 한 해의 결산과 내년의 계획을 보고했다.
연말에 단 한 번 참석하는 사장단 회의. 사장단 회의는 원칙을 가지고 진행됐다. 첫째, 먼저 회의석상에서 문제점을 활발하게 토의하도록 하고 개선책을 토의한 다음 금후의 방침을 모색하게 하는 회의 형식을 취한다. 핵심적으로 숫자개념에 입각해서 토의와 개선책을 논하는 것이다. 둘째, 회의보고에는 매출액, 이익, 시설의 증설과 자산의 변동사항, 경영상의 문제점과 대책, 내년도의 전망 등을 요약해서 발표하도록 했다. 셋째, 경영 실적에 관한 보고에서는 목표 대비 실적이 어떠한가를 중점적으로 분석·보고토록 한다. 목표가 달성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 원인의 규명과 금후의 개선책을, 목표를 초과달성했을 때도 그 원인을 밝혀주는 보고를 하도록 한다. 넷째, 결정은 곧 실천이다. 따라서 실현 불가능한 것이 있는 사업은 결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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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정례 사장단 회의가 끝나면 이병철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주로 오쿠라 호텔에 머물면서 새해의 경영진 인사를 구상하는 것이다. 약 보름 동안의 인사 구상이 끝나면 2월 초에는 삼성 사장단의 인사발령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2월11일에는 인사이동령이 통보된다.
그러나 1982년부터는 그 인사이동도 조우동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 인사위원회에 맡기고, 회장 자신은 최종결재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병철의 인사방침은 온정주의가 배제된 철저한 능력주의이다. 경영실적이 나쁜 사장은 가차없이 인사조치된다. 이병철 회장은 인재를 아꼈지만, 기대에 못미치거나 능력이 없다고 최종 판단된 인재는 가차없이 사표를 받았다. 이병철의 인재관은 '사람은 그릇의 크기만큼 일한다'는 것이다. 사장은 사장의 그릇이 있으며, 상무는 상무의 그릇이 있다는 것이다. 사장의 그릇이 안되는 사람을 사장에 앉혔을 경우에는 그 사람도 죽고 그 직책도 죽는다는 것이다.
당시의 삼성은 능력에 따라 연봉도 달랐다. 이른바 차등상여금제도를 국내에서는 최초로 도입해서 경영실적이 좋은 임원들에게는 파격적인 상여금을 주지만 실적이 부진하면 그 자리마저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병철의 경영방침에는 '부실은 사회적 죄악'이라는 철학이 작동하고 있다. 이병철 재직 시의 삼성은 거의 전부분에 걸쳐 1위를 해왔다. 제당, 모직, 식료품, 전자, 건설, 조선, 금융, 보험, 증권, 신문, 호텔, 백화점, 병원 등 삼성의 계열사들은 각자 분야에서 최고를 유지했던 것이다. 삼성의 제일주의는 이병철의 집념에서 비롯된다. 삼성본관 건물을 지을 때도 이병철은 국내 최고의 건물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1969년 삼성전자 공장을 지을 때도 일본에서 가장 큰 전자공장이 40만평이란 것을 알고 그보다 1만평이 더 큰 41만평의 대지를 확보했다. 안양 골프장을 지을 때도 일본의 내로라 하는 골프장을 둘러본 후, 그 골프장들의 장점과 특성만을 살려 건설에 착수했다.
그의 일등주의에 대한 집념이다.
홍하상 전경련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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