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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의 문명산책] 공치러 가는 사람들

2025-03-07

실크로드 타고 전파된 격구

문명교류 증거로 역사 관통

日벽화 막대 든 고구려인도

새 문명 궤적 그려내기 위해

공치러 간 사람이 틀림없어

[김중순의 문명산책] 공치러 가는 사람들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아스카(飛鳥)에 갔다가 고구려 사람들을 만났다. 행진하는 남자 넷과 일곱 가지 색깔의 비단 색동옷을 입은 여자 넷이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다. 그들 가운데 끝이 구부러진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 있는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은 영락없이 공치러 가는 사람들이다. 그 막대기를 여의봉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고 철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누가 봐도 폴로나 골프, 혹은 요즘 유행하는 파크 골프채를 연상시키는 말렛(mallet)이다.

아스카는 일본의 고대 문명에 크게 기여한 한반도 도래인들의 터전이다. 7세기 말에 제작된 이 고분벽화는 일본 최초의 궁정화가였던 고구려인 황문본실(黃文本實)이 그린 것이다. 북한 남포시에 있는 강서대묘의 천장별자리와 청룡, 주작, 백호, 현무의 사신도(四神圖)의 축소판을 이곳에서 그대로 볼 수 있으니, 문명교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벽화의 인물들이 들고 있는 말렛은 공치기 놀이의 기원을 생각하게 한다. 규칙과 스포츠로서의 체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공치기 놀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민속의 장치기가 대표적이다. 끝이 구부러진 막대기로 구멍에, 혹은 골대를 만들어 공을 쳐서 넣는 방식인데, 아이들과 여인들도 쉽게 할 수 있는 놀이다. 넓은 마당을 걸어 다니며 공을 치는 방식이 오늘날의 필드하키와 골프의 원조라면, 말을 달리며 공을 쳐서 넣는 방식은 격구 혹은 폴로에 해당한다.

이런 형태의 공치기 놀이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중앙아시아 산악지대에서 시작되어 자연스럽게 동쪽으로 전해졌다. '샤냐메'나 '게사르'와 같은 서사시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그 전파 루트는 페르시아에서 서북 인도와 티벳·몽골을 거쳐 동반구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와 그대로 일치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격구를 그린 화상석이나 벽화가 당·송·명·청의 전체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페르시아와 신라의 교류를 이야기하고 있는 '쿠쉬나메'에서도 격구는 매우 중요한 외교 수단이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方形墳)의 모서리 기둥에 새겨진 말렛을 들고 있는 서역인의 모습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발해 시대에는 8세기 후반 정효공주 무덤벽화의 말렛을 든 여인에게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발해국 사신 왕문구(王文矩)가 일본 궁정에서 타구를 시연했다는 문헌 자료와 더불어 문명교류의 또 다른 증거인 셈이다.

고려 시대에는 격구 경기장으로 크고 작은 구정(毬庭)이 있었다. 왕건과 견훤 군사들의 힘겨루기도 격구 경기를 통해 이루어졌다. 단옷날에는 조정에서 원나라와 국제 경기를 하기도 했고, 무신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격구 대회가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격구에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세종은 격구를 아예 무과시험으로 채택하여 이를 무예의 형태로 다듬었고, '회례악'이라는 음악과 춤까지 만들었다.

기원전 4세기,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있던 스물두 살의 청년 알렉산더에게 말렛과 공을 선물로 보냈다. 장난감 놀이나 하라는 조롱이었다. 가만히 있을 알렉산더가 아니었다. 그는 공이 너무 작으니 아예 지구를 날려버리겠다고 했다. 어지러운 세상, '한 방'으로 정리해버리겠다는 그의 호연지기는 실제로 동방정복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명의 궤적까지 그려냈다. 아스카 고분벽화의 고구려인들 역시 그 '한 방'을 위해 발해를 거쳐 일본까지 공치러 간 사람들이 틀림없다. 새로운 문명의 궤적을 그려내기 위해.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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