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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20> 이병철의 타계, ‘37개 기업 설립’ 호암의 시대 저물고 이건희의 시대로

2025-06-06 08:15
승지원에서의 이병철. 승지원은 삼성이 주요 국빈·글로벌 CEO들을 초대해 비즈니스 협력방안을 논의해온 장소다. <삼성그룹 제공>

승지원에서의 이병철. 승지원은 삼성이 주요 국빈·글로벌 CEO들을 초대해 비즈니스 협력방안을 논의해온 장소다. <삼성그룹 제공>

1987년 9월 말 서울대병원 내과의 서정돈 교수는 왕진 가방을 들고 급히 나섰다. 이태원에 있는 이병철의 자택에서 와달라는 전갈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정돈 교수는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체 회장이 직접 와달라고 전갈을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소문으로 이병철 회장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이병철 회장을 봤다. 이병철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서정돈 교수는 말렸다. 그러자 이병철은 와주어서 고맙다며 웃는 표정을 지었다. 한평생을 살면서 제일주의와 완벽주의로 일관해온 대기업 총수답지 않게 표정이 온화했다. 환자답지 않게 표정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이 회장의 용태는 이미 전해 듣고 있었다. 그에게서의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서정돈 교수는 알고 있었다. 머지않아 닥쳐올 죽음 앞에 선 사람치고는 표정이 담담해 보였다.


암 투병생활에도 자기관리 엄격하게

안국빌딩 준공식이 마지막 공식 행사

라이벌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등 추모

국가·사회공헌 실천 77년 생애 마무리

삼성 비서실에서 서 교수에게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이병철은 매일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냉온탕을 했고, 평소에도 규칙적인 골프로 체력관리를 하였으며, 자신의 병에 관한 많은 책을 읽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분석, 검토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본인 자신은 엄격한 투병생활을 하였으나, 타인들에게는 결코 엄격하지 않았다. 비서실 자료에는 작년 5월 기침 등 평소와는 다른 증상이 있어 진단을 받았다고 적혀 있고, 거기에는 진단을 내리는 과정에서부터 치료 선택의 과정이 철두철미하게 요약돼 있었다.


검사 일지를 보면 X선 촬영을 시발로 기관지, 내시경 검사, 조직검사로 이어지고 외국에서의 진단방법, 폐암에 대한 최신 논문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치료 방법도 수술, 화학요법, 방사선요법 등 세 가지 방법이 수십 명의 의료진에 의해 검토된 자료가 있었으며, 방사선 치료로 결정이 난 후에도 가장 최신의 신뢰할 방사선 요법을 가지고 있는 국가, 또 암종별로 어느 병원이 가장 좋은 결과를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 등이 정리돼 있었다. 어떠한 일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최선의 방법을 찾아나서는 탐구자의 자세가 비서실의 자료엔 있었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이병철의 경영철학과 너무나 일치해 있었다. 이 회장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서정돈 교수가 주치의가 돼 병세를 관리하고 있었지만 이미 병은 위중했다.


이맹희(왼쪽 네 번째) CJ 명예회장이 이건희(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1987년 11월20일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의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맹희(왼쪽 네 번째) CJ 명예회장이 이건희(왼쪽 두 번째) 삼성전자 회장과 함께 1987년 11월20일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선대 회장의 영정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마지막 행사 참가

10월17일, 이병철은 병중에서도 안국빌딩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행사 참석이었다. 10월23일에는 불편한 몸을 곁에서 부축하려는 지인들을 뿌리치고 걸어서 차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그것이 마지막 외출이었다. CT(전산화두부단층촬영기) 검사를 할 때 유감스럽게도 간호사가 혈관을 제대로 찾지 못해 수십 번 주사바늘을 찔렀으나 이병철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호사가 나가자 주치의 앞에서는 '검사 과정이 정말 괴로웠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통이 심한 와중에도 삼성종합기술원 개원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끝내 아쉬워하였고, 거동이 불편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괴롭게 생각했다. 고려병원 내과의 박정로 선생이 검사 결과를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방향으로 설명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굳은 표정에서 결과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는 일체 검사 결과에 관해 이병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11월6일, 이병철은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서울대병원의 스태프와 고려병원의 스태프 및 미국 슬로언 캐터링센터 방사선과의 김재호 박사가 모여 마지막 처치를 했다. 하지만 경과는 빠른 속도로 악화돼갔다. 본인 자신도 그러한 것을 눈치챘는지 가족을 대할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며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때가 많아졌다. 그러나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는 본인의 노력은 무의식 중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11월19일, 여러 차례 호흡곤란을 느끼던 이병철은 세상을 떠났다. 거인의 77년 생애도 끝났다. 1910년 조선이 망하던 해에 태어나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으로 일본어로 교육받은 첫 세대였던 이병철, 일본을 이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이병철, 악전고투 속에서도 예의 치밀한 분석력과 결단으로 한국의 산업을 주도했던 이병철, 한국비료와 동양방송을 빼앗기고도 항상심을 잃지 않았던 이병철, 1등에의 집착이 강해서 2등을 용납하지 않았던 이병철, 냉정함과 침착함으로 무장하고 평소 논어로 자신을 경계해왔던 이병철. 그의 생애는 한일합병, 중일전쟁, 일본패망, 한국전쟁, 4·19혁명, 5·16 군사정변, 1980년 군부집권 등 세월의 격랑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1987년 11월23일 열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례식에서 애도하고 있는 장남 이맹희, 3남 이건희, 차남 이창희 형제(오른쪽부터). <삼성그룹 제공>

1987년 11월23일 열린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례식에서 애도하고 있는 장남 이맹희, 3남 이건희, 차남 이창희 형제(오른쪽부터). <삼성그룹 제공>

이병철의 장례식

11월23일 아침 8시, 서울 이태원동 자택 빈소에서 발인식을 마친 뒤, 이병철의 유해는 호암아트홀로 운구됐다. 평생 삼성과 각축전을 벌이며 늘 경쟁 상대에 있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조사를 했다. 두 사람은 사업상에서도 라이벌이었지만 골프를 칠 때도 라이벌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병철을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호암의 승부에 임하는 자세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는 골프를 칠 때이다. 호암은 사업상의 경쟁뿐만 아니라 운동경기에서도 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이는 단순한 승부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바의 플레이가 나오지 않았던 것에 대해 스스로 용인을 못하는 것이다. 사업을 하다 보면 반드시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과감히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도 있고, 정교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재추진을 해야 할 때도 있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삼성이 굳건히 그 위피를 지키고 있는데에는 바로 호암이 승부를 임할 때 갖고 있던 이러한 자세가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해외의 우인 대표로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1911~) 일본 상공회의소 특별고문이 조사를 했다. 세지마 씨는 이병철 회장과 오랫동안 친분을 나눈 사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 육사 2년 선배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조언을 했던 기업인이었다. 우리나라가 수출 1천억불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역상사를 설립해야 한다고 조언해서 한국에 무역상사 도입 법안을 만들도록 했으며, 이병철 회장도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삼성물산 내에 무역상사를 최초로 도입하기도 했다.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세지마 류조로서는 이병철의 한 시대가 그 얼마나 힘들고 파란만장했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세지마 류조의 조사이다. "호암 선생의 경영 특징을 말하라면 단연 선견지명을 꼽고 싶다. 기존의 기업을 잘 경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업을 창업하고 또 하는 일마다 성공했던 것도 바로 그 놀라운 선견지명 덕이다. 그래서 나는 사업가라기보다 늘 새로운 것을 개척해가는 창업가로서 호암 선생을 기억한다."


이병철이 만든 기업들

이병철은 살아생전에 많은 일을 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창립해 오늘날 삼성그룹의 기틀을 만든 후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설립했고, 1953년에는 제일제당을, 1954년에는 제일모직, 1958년에는 안국화재(1993년 12월 삼성화재로 상호 변경), 1963년에는 동방생명(1989년 7월 삼성생명으로 상호 변경),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1965년에는 삼성문화재단과 중앙일보를, 1966년에는 고려병원을, 또 그 같은 해 12월에는 중앙개발(현재의 삼성에버랜드)을, 1969년에는 삼성전자를, 또 같은 해 12월에는 삼성산요전기를 설립했다. 1970년에는 삼성NEC(1970년 삼성전관으로 상호 변경), 1972년에는 제일합섬을, 또 같은 해 11월에는 신라호텔, 1974년에는 삼성석유화학과 삼성중공업을, 1977년에는 삼성종합건설을, 또 그해 4월에는 삼성조선(현재의 삼성중공업), 8월에는 삼성정밀(현재의 삼성항공산업), 1978년에는 중앙엔지니어링(현재의 삼성엔지니어링)을 만들었다. 1980년에는 한국전자통신(현재의 삼성반도체통신), 1981년에는 한국안전시스템(현재의 에스원), 1982년에는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또 그 해에는 호암미술관 등을, 1983년 6월에는 삼성시계를, 1985년에는 호암아트홀과 삼성데이타시스템(현재의 삼성SDS) 등 살아생전에 37개의 기업을 설립했다.


보보시도장(步步是道場)이란 한 걸음, 한 걸음이 인생이라는 뜻이다. 이병철이 자주 인용하던 한문의 한 구절이다. 이병철은 기업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일치돼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다. 이병철이 평생 기업가로서 일관해왔던 정신은 바로 공존공영과 국가, 사회에의 공헌이었다.


자 이건희의 시대로 접어든다. 이건희는 이미 차기 회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거대 기업 삼성을 물려받은 2대 회장은 삼성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 이제 그의 활약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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