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피아노 독주곡 전곡 연주 ‘숨죽인 3시간’
1천284석 가득 메운 객석 기립박수로 화답
조성진 미소년의 미소 지어보이며 “좋았어요”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클라이맥스를 위한 절제와 클라이맥스가 주는 울림이 환상적이었던 연주, 타건 사이 여백이 주는 몰입감과 긴장감, 그리고 숨죽여 기도하듯 귀기울이는 관객과 공연장을 둘러싼 공기. 이 모든 것이 환상적인 조합을 이룬 시간이었다.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지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리사이틀은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작품과 대화하고 있는 조성진을 볼 수 있는 무대였다. 그의 타건으로 물의 흐름부터 나방, 조각배, 요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신하는 피아노 선율은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이날 조성진은 라벨의 피아노 독주곡 전곡을 연주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선사했다. 지난 1월 조성진이 라벨 탄생 150주년을 맞아 발매된 라벨 피아노 독주곡 전곡 녹음 음반에 수록된 곡을 순서대로 들려줬다.
합창석까지 합쳐 총 1천284석을 가득 메운 객석 앞에 검은 수트를 입은 조성진이 꼿꼿한 자세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객석 앞뒤로 인사를 하고는 이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얹은 손이 위아래로 튕기며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라벨의 피아노 세계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이어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까지 연주한 뒤 처음으로 손수건을 들어 얼굴을 살짝 닦으며 한템포 쉬어갔다. 그러자 객석에서는 참아왔던 기침이 이곳저곳에서 살짝 터져나왔다.
이후 '물의 유희'로 이어졌다. 끝간 데 없이 움직이는 물의 흐름을 정체된 움직임과 격렬한 소용돌이 등의 다양한 표정으로 그려낸 독특한 걸작이다. 리듬에 맞춰 고개를 살짝 갸웃갸웃하기도 하고, 몸을 뒤로 제치기도 하며 작곡가의 곡을 자신만의 음악으로 만들어 표현하려는 인상을 줬다.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인터미션 후 '거울'과 '밤의 가스파르'를 들려주는 2부에서는 '거울' 연주 후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서 잠시 물을 마신 뒤 '밤의 가스파르' 연주를 이어갔다. 조성진 피아노는 라벨의 작품을 수채화로 그려냈고 번져가는 물감 색깔마냥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특히 '밤의 가스파르' 중 '스카르보'에서는 페달을 밟으며 내는 울림이 과연 피아노 한 대가 내는 소리냐고 반문케 했다.
다시 인터미션 후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에서부터 시작해 마지막 곡인 '쿠프랭의 무덤'에 도달했다. 조성진은 이번 공연에서 타건 사이 여백을 줌으로써 관객들을 휘어잡고 공연장의 공기마저 조성진의 편으로 만들었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어디인지, 큰 그림이 보이게 연주하려고 한다"고 밝힌 그의 연주 철학이 고스란히 느껴진 무대였으며, 클라이맥스를 위한 절제가 전율을 느끼게 했다.
밤 10시10분 무렵, 마라톤 같은 연주 3시간의 대장정 마지막 음표가 울리자 객석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조성진은 커튼콜 세 번째 인사에서 앙코르는 없다는 의미인 듯 피아노 건반 뚜껑을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연주 여정을 함께 한 객석은 완전 매혹당했다.

영남일보 창간 80주년 기념으로 20일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조성진이 모리스 라벨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다. 이윤호기자 yoonhohi@yeongnam.com
공연 후 백스테이지에서 잠시 만난 조성진은 오늘 공연 어땠냐는 질문에 "좋았어요"라고 짧게 대답하고 미소년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들은 말이 '좋았어요'와 웃음 한 번이 다였지만, 자신에 대한 만족에 인색한 듯 느껴지는 말수 적은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그 말과 표정에는 도리어 많은 표현이 담겨 있었다.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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