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0117022280642

영남일보TV

  • [영상]영·호남 공동선언…균형발전 위해 한목소리
  • 8천원에 판매되는 두바이쫀득쿠키, 직접 원가 측정해보니…

[걸어서 만나는 우리 동네 문화유산] “개무덤이요”…금복주 뚜껑 나온 신라 왕족의 무덤

2026-01-17 09:08

경주 용강동 고분, 도심 흙언덕에 숨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 묘
주민들에겐 ‘아무개 무덤’…택시기사도 아는 동네 별명
도굴 흔적 속 토용·십이지상 출토, 발굴로 정체 드러나
논밭에서 아파트 사이로, 도시가 삼킨 천년의 시간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자리한 경주 용강동 고분 봉분(경주시 용강동 1130-2).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무덤으로 불렸던 이 고분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자리한 경주 용강동 고분 봉분(경주시 용강동 1130-2).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무덤'으로 불렸던 이 고분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경주에서 택시를 타고 "용강동 개무덤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말하면 기사들은 주저 없이 방향을 튼다. 도심 한가운데 둥근 흙언덕을 두고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개무덤'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 언덕의 공식 이름은 '경주 용강동 고분'. 통일신라 시기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국가 사적이다.


왜 왕족의 무덤이 개무덤이 됐을까. 1980년대 발굴 당시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박임관 경주문화원장은 "예전에는 이곳이 무덤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미 도굴돼 방치된 흙무더기처럼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무덤 주인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무개 무덤', '개무덤', '말무덤' 같은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었다는 설명이다.


박 원장은 "도굴이 됐다는 건, 누군가는 이미 오래된 고분이라는 걸 알고 파헤쳤다는 뜻"이라며 "좋은 유물은 이미 다 가져가고 눈에 잘 띄는 큰 것들만 챙겨 간 뒤 흔적만 남겨둔 상태였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주민들 눈에 이곳은 돌무더기나 흙언덕에 불과했다. 잡풀이 무성하고 쓰레기가 버려지기도 하면서 생활 공간의 일부처럼 여겨졌고 일부 지역에는 충직한 개가 불을 끄다 죽어 묻혔다는 이야기 같은 전설도 덧붙여졌지만 사실과는 무관한 민간 설화에 가깝다.


이 무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신라문화동인회의 건의로 발굴 조사가 이뤄진 1986년이다. 조사 결과 내부가 돌로 방을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구조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미 도굴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석실 안에서는 토기와 토용, 청동제 십이지상이 출토됐다.


박 원장은 발굴 당시를 떠올리며 "석실분이라 위에서 구멍을 뚫고 들어간 흔적이 뚜렷했다"며 "밤에 들어가 작업하면서 크고 값나가는 것만 챙겨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남아 있던 유물들은 크기가 작고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었다.


도굴 정황을 보여주는 일화도 남아 있다. 박 원장은 "정확한 사실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석실 안에서 금복주 소주병 뚜껑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도굴꾼들이 작업하다 남긴 흔적이라는 말이 현장에서도 돌았다"고 했다.


산책로와 맞닿은 경주 용강동 고분 전경(경주시 용강동 1130-2). 한때 방치됐던 흙언덕은 지금은 도심 속 공원처럼 정비돼 주민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산책로와 맞닿은 경주 용강동 고분 전경(경주시 용강동 1130-2). 한때 방치됐던 흙언덕은 지금은 도심 속 공원처럼 정비돼 주민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출토된 토용은 길이 12~21㎝ 크기의 인물상으로 홀을 든 문인상과 무인상, 여인상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일부는 붉은색으로 채색돼 있었고 옷차림을 통해 당시 신라 귀족의 복식 양상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됐다. 이는 순장 제도가 금지된 이후 실제 사람 대신 토용을 무덤에 넣는 장례 풍습이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함께 출토된 청동제 십이지상은 방위에 맞춰 배치돼 있었는데, 이는 당나라 무덤에서도 확인되는 장례 양식이다. 박 원장은 "예전에는 십이지상을 무덤 바깥에 새기다가 후대로 갈수록 무덤 안에 넣는 방식으로 바뀐다"며 "토용과 십이지상을 함께 넣을 수 있을 정도면 왕이거나 왕에 가까운 왕족급 인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무덤 주인의 이름과 정확한 신분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출토 유물과 구조를 종합하면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통일신라 시기, 진골 귀족급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호석 일부가 주택 건축 과정에서 사라진 점도 후대 개발 과정에서 훼손이 컸음을 보여준다.


현재 용강동 고분은 아파트와 상가 사이 공원처럼 정비돼 있다. 박 원장은 "발굴 전에는 논 한가운데 있던 무덤이었다"며 "도시가 커지면서 주변만 변하고 무덤만 남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한때 아무개 무덤, 개무덤으로 불리며 방치됐던 흙언덕은 이제 국가가 관리하는 문화재가 됐다. 하지만 주민들 입에서는 여전히 옛 이름이 더 익숙하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무덤이 일상의 풍경이 된 자리. 용강동 고분은 경주 곳곳에 남아 있는 '이름 없는 문화유산'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자 이미지

장성재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경북지역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