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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나는 우리 동네 문화유산] “개무덤이요”…금복주 뚜껑 나온 신라 왕족의 무덤

2026-01-17 09:08

이름 없는 경주 용강동 고분, 통일신라 진골 귀족 묘 추정
도굴 흔적 속 토용·십이지상 출토…발굴조사로 정체 드러나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자리한 경주 용강동 고분 봉분(경주시 용강동 1130-2).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무덤으로 불렸던 이 고분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아파트와 상가 사이에 자리한 경주 용강동 고분 봉분(경주시 용강동 1130-2).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무덤'으로 불렸던 이 고분은 통일신라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경북 경주에서 택시를 타고 "용강동 개무덤 근처에서 내려달라"고 말하면 기사들은 주저없이 방향을 튼다. 도심 한가운데 둥근 흙언덕을 두고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개무덤'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 언덕의 공식 이름은 '경주 용강동 고분'. 통일신라 시기 진골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국가 사적이다.


왕족의 무덤을 왜 개무덤으로 부르게 됐을까. 1980년대 발굴 당시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박임관 경주문화원장은 "예전에는 이곳이 무덤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고 이미 도굴돼 방치된 흙무더기처럼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보니 '아무개 무덤'이라 부르기도 했고, 그러다 '개무덤', '말무덤' 같은 이름으로 쉽게 굳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개무덤이라는 이름과 함께 여러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충직한 개가 불을 끄다 죽어 묻혔다'는 식의 전설도 전해졌지만, 이는 사실과는 무관한 민간 설화에 가깝다는 게 박 원장의 설명이다. 그는 "카더라식으로 덧붙은 이야기들이 지역마다 좀 있었지만, 본질은 정체를 모르는 무덤이었다는 데 있다"고 했다.


박 원장은 "그 시절에는 이런 봉분들이 도심이나 마을 주변에 관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잡풀이 나 있고 나무가 서 있고 쓰레기까지 버려지다 보니 주민들 눈에는 그냥 정체 모를 흙무더기였던 셈"이라고 했다. 또 "실제로 개를 묻어서 개무덤이라 한 게 아니라, 방치된 채 남아 있는 주인 모를 무덤을 쉽게 부르기 위한 생활 속 호칭으로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 무덤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신라문화동인회의 문제 제기와 발굴 건의가 계기가 됐다. 박 원장은 "당시 신라문화동인회에서 이곳을 그냥 두면 안 된다고 보고 발굴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며 "그전까지는 단순한 흙무더기로 남아 있었지만, 일부에서는 오래된 고분일 가능성을 계속 제기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신라문화동인회는 향토사 연구자와 교사, 기자들이 함께 지역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지켜보던 모임이었다"며 "이슈가 될 만한 곳은 기사로 알리고, 발굴이 필요하면 문제를 제기하고, 그래야 정비와 보존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발굴이 돼야 실체가 밝혀지고 실체가 밝혀져야 문화재로 관리가 된다"며 "용강동 고분도 그런 과정을 거쳐 이름을 찾은 경우"라고 설명했다.


박 원장 자신도 당시 20대 초반 무렵 현장을 직접 오가며 발굴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발굴하기 전 제가 가봤을 때는 정말 논 한가운데 봉분 하나가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며 "사방이 논밭이었고 나무가 한두 그루 서 있는 정도였는데, 외형만 봐도 그냥 흙무더기라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자리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말했다.


신라문화동인회의 건의 이후 1986년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조사 결과 내부가 돌로 방을 만든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묘) 구조로 확인됐다. 이미 도굴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석실 안에서는 토기와 토용, 청동제 십이지상이 출토됐다. 박 원장은 "직접 발굴 과정을 지켜봤는데 내부 구조가 확실한 석실분으로 확인되면서 무덤의 성격이 분명해졌다"고 회상했다.


산책로와 맞닿은 경주 용강동 고분 전경(경주시 용강동 1130-2). 한때 방치됐던 흙언덕은 지금은 도심 속 공원처럼 정비돼 주민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산책로와 맞닿은 경주 용강동 고분 전경(경주시 용강동 1130-2). 한때 방치됐던 흙언덕은 지금은 도심 속 공원처럼 정비돼 주민들의 일상과 맞닿아 있다. 장성재기자 blowpaper@yeongnam.com

도굴은 이미 오래전에 이뤄진 상태였다. 박 원장은 "도굴이 됐다는 건 이미 누군가는 오래된 고분이라는 걸 알고 파헤쳤다는 뜻"이라며 "값나가는 유물은 대부분 사라지고 크기가 작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만 남아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석실 구조상 위에서 파고 들어간 흔적이 뚜렷했다"며 "밤에 들어가 큰 것 위주로 챙겨 나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굴 정황을 보여주는 일화도 남아 있다. 박 원장은 "정확한 사실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석실 안에서 금복주 소주병 뚜껑이 나왔다는 이야기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며 "도굴꾼들이 작업하다 남긴 흔적이라는 말이 현장에서도 돌았다"고 했다. 그는 "천년 전 무덤 안에서 현대 물건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 무덤이 어떤 훼손을 겪어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덧붙였다.


박 원장은 "도굴꾼 입장에서는 밤에 손전등 하나 들고 들어가 빠르게 훑고 나왔을 것"이라며 "토용처럼 크기가 한 뼘 남짓한 것들은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고 남겨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발굴 당시 남아 있던 유물들은 상대적으로 작고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이었다.


출토된 토용은 길이 12~21㎝ 크기의 인물상으로 홀을 든 문인상과 무인상, 여인상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일부는 붉은색으로 채색돼 있었고, 옷차림을 통해 당시 신라 귀족의 복식 양상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됐다. 이는 순장 제도가 금지된 이후 실제 사람 대신 토용을 무덤에 넣는 장례 풍습이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박 원장은 "토용은 장식물이 아니라 신하를 대신하는 존재로 봐야 한다"며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처럼 높은 신분의 무덤에 수행적 의미를 담아 넣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정도 구성을 갖춘 무덤이라면 주인공의 신분이 결코 낮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함께 출토된 청동제 십이지상은 방위에 맞춰 배치돼 있었는데, 이는 당나라 무덤에서도 확인되는 장례 양식이다. 박 원장은 "예전에는 십이지상을 무덤 바깥에 새기다가 후대로 갈수록 무덤 안에 넣는 방식으로 바뀐다"며 "용강동 고분은 그런 변화가 실제로 확인되는 사례"라고 말했다. 또 "토용과 십이지상을 함께 넣을 수 있을 정도면 왕이거나 왕에 가까운 왕족급 인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했다.


무덤 주인의 이름과 정확한 신분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출토 유물과 구조를 종합하면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통일신라 시기 진골 귀족급 인물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박 원장은 "왕까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거의 왕릉급에 가까운 후기 고분으로 볼 만하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는 호석 규모와 구조가 꼽힌다. 박 원장은 "둘레를 감싸던 호석도 원래는 더 많았을 텐데, 집을 짓는 과정에서 가져다 쓰이거나 사라진 것들이 많다"며 "지금 남은 것만으로도 상당한 급의 무덤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도굴이 내부 유물을 비워냈다면, 후대 개발과 생활 훼손은 무덤 바깥 구조까지 깎아낸 셈이다.


현재 용강동 고분은 아파트와 상가 사이 공원처럼 정비돼 있다. 박 원장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주변만 바뀌고 무덤만 남은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시민들이 쉬어가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천년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도심 한복판, 그것도 주거지와 상업시설 사이에 국가 사적이 남아 있는 풍경은 흔치 않다. 경주에서는 이 장면이 그나마 낯설지 않지만, 다른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다. 관광지로 정비된 왕릉과 달리, 용강동 고분은 생활권 한복판에 역사와 일상이 맞닿아 있는 드문 사례다.


경주에서 이런 풍경은 용강동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북천 너머 황성동에도 주민들 사이에서 비슷하게 '개무덤'으로 불려온 고분이 남아 있다. 경주 황성동 고분 역시 용강동 고분과 함께 평지에 자리한 대표적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도굴된 채 방치됐다가 발굴 조사를 통해 실체가 확인됐다. 용강동과 황성동의 사례는 경주 북천 북쪽 생활권 안에 이름 없이 남아 있던 봉분들이 뒤늦게 사적으로 정리돼 온 흐름을 보여준다.


박 원장은 "예전 안내판에는 신라문화동인의 건의로 발굴됐다는 취지의 설명도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만큼 지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문화재로 드러내는 과정 자체가 중요했다"고 말했다. 무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낸 것은 결국 지역 사회의 관심과 기록이었다는 이야기다.


한때 '아무개 무덤', '개무덤'으로 불리며 방치됐던 흙언덕은 이제 국가가 관리하는 문화재가 됐다. 하지만 주민들 입에는 여전히 옛 이름이 더 익숙하다. 천년의 시간을 품은 무덤이 일상의 풍경이 된 자리, 용강동 고분은 경주 곳곳에 남아 있는 '이름 없는 문화유산'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자 이미지

장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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