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너머
◆담장 너머/박기옥 지음/학이사/248쪽/1만5천원
박기옥 수필가의 7번째 수필집 '담장 너머'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여류 수필가의 감성적 수필과는 달리 어두운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어루만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먼저 가족이 등장한다. 우리가 건너온 농경사회는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시대였다. 자식이 성년이 되어 가정을 이루면 부모는 논밭을 조금 떼어 독립을 시켰다. 지금은 산업사회이다. 이제는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부모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재빨리 독립하는 것이 좋다. 조금 이르게, 자식이 미처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서운할 시점일수록 좋다. 작가는 이를 '담장 너머의 낯섦'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여태껏 자신의 담장을 쌓는 일에만 전념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담장 너머에 무언가가 있음을 독자들에게 귀띔한다.
그는 수필을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확장하는 문학 장르'로 정의한다.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오래된 꿀병 뚜껑이 열리지 않자 명절에나 올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경비실로 가지고 간다. "뚜껑이 안 열려요." "어디 봅시다." 거짓말처럼 단번에 뚜껑이 열린다. 담장 너머에는 어디든지 전문가가 있는 법이다. 오전 내내 씨름하던 병뚜껑을 1분 이내에 해결하지 않았는가. 담장 너머에는 내가 도울 일도, 도움을 받을 일도 많았다.
박기옥의 '담장 너머'는 전편을 흐르는 52편 대부분이 우리가 아침, 저녁 만나는 일상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독자에게 스스로 쌓은 담장에 갇히지 말고 그 너머를 깨금발해 보라는 팁을 준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는 날마다 담장 너머로 꽉 닫힌 꿀병 뚜껑 하나를 기분 좋게 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상그럽기 그지없는
◆상그럽기 그지없는/박성규 지음/시인동네/121쪽/1만2천원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 '상그럽기 그지없는'이 시인동네 시인선 261번으로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서 박성규는 '사건'과 '선택'이라는 삶의 근원적 문제를 특유의 능청스러운 시선으로 풀어낸다. 그는 어떤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다시 찾아오는 또 다른 선택의 갈등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고, 때로는 초점이 어긋난 돋보기를 들이대듯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여준다. 그 왜곡은 회피가 아니라 삶을 견디는 방식이며, 아이러니를 통과해 도달한 성찰의 형식이다.
시집은 "내게 사건이 생겼다는 건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사건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기보다, 내가 관여하는 순간 비로소 삶의 파문이 된다. 멀리서 일어나는 수많은 지진은 정보에 불과하지만, 나의 도시에서 발생한 진동은 곧 불안과 선택의 문제로 다가온다. 이처럼 사건은 객관적 크기가 아니라 주체의 인식과 참여에 의해 형성된다.
또한 그는 사건을 우연이나 불가항력으로 볼 것인가, 인과의 결과로 볼 것인가라는 인식의 갈림길을 제시한다. 전자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줄어들지만, 후자에서는 모든 결과가 자신의 몫이 된다. 박성규는 그 사이에서 우직하게 맞서기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능청'의 태도를 취한다. 이는 결함을 넘어선 삶의 기술이자, 경험에서 비롯한 불안을 건너는 지혜다. '상그럽기 그지없는'은 결국 스스로 깨우치는 앎의 과정이며, 한 걸음 더 세계와 동행하려는 시적 여정의 기록이다.
징검다리
◆징검다리/임춘희 지음/도서출판 소소담담/231쪽/1만5천원
임춘희 수필집 '징검다리'는 첫 책 '바람이 지나간 자리' 이후 11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수필집이다. 삶의 여러 역할을 감당하며 글쓰기를 잠시 미루어야 했던 시간 끝에, 차곡차곡 쌓아온 기록을 한 권으로 묶었다. 쓰지 않으려 해도 결국 한 줄을 적어야 마음이 놓였다는 고백에서, 글이 곧 삶의 숨구멍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업가로 살아오며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순간들을 견뎌야 했다.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중심을 잡아야 했고, 새벽 출근길마다 '내 안의 여린 여자'를 잠시 접어둔 채 경영자로 서야 했다. 때로는 스스로를 단단히 무장시키며 세상의 편견에 맞섰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때의 대응들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길어 올린 유머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삶의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책 제목처럼 그의 인생은 징검돌을 건너는 여정에 비유된다. 크고 평평한 돌도 있었지만, 미끄럽고 위태로운 돌 앞에서 중심을 잃고 보따리를 떨어뜨린 적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균형을 잡아 다음 돌로 발을 옮겼다. 흔들림과 상처의 자리마다 배움과 지혜가 쌓였고, 시간은 상처 위에 새살을 돋게 했다. '징검다리'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넘어, 삶에는 정답도 백과사전도 없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자신이 건너온 돌다리가 누군가에게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책이다.
새가 되고 싶었습니다
◆새가 되고 싶었습니다/김명희 지음/잉어등/111쪽/1만3천원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으로 알려진 일본 하이쿠가 주목받듯, 디카시는 SNS 시대에 급부상한 새로운 문학 장르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포착한 이미지에 5행 이내의 짧은 언어를 더하는 형식은 쓰기와 읽기가 간편해, 바쁜 일상 속 현대인들에게 친화적으로 다가간다. 각종 공모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기존 시인들까지 창작 무대를 옮겨올 만큼 열기도 뜨겁다. 동호회 활동 역시 활발해지며 디카시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하는 분위기다.
김명희 시인은 사진 애호가로 출발해 디카시의 가능성을 빠르게 자기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신생 매체와 잡지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지금의 디카시단은 마치 서부 개척 시대를 방불케 한다. 선점과 개성이 중요한 흐름 속에서 그는 뛰어난 영상 감각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가고 있다. 사물의 목소리를 받아쓰듯 풀어내는 시선, 1인칭을 넘어 대상과 시점을 유연하게 이동하는 서술은 그의 강점이다.
특히 낡은 구두 한 켤레를 통해 욕망과 존재의 물음을 환기하는 상상력은 상징과 알레고리를 넘나든다. 이는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시키는 초현실적 발상과도 맞닿아 있다.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는 사랑이다. 일부 작품이 전통적 풍경과 사유를 담아 종교적 색채로 비칠 수 있으나, 그 바탕에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려는 온정과 보리심이 흐른다. 김명희의 디카시는 이미지와 언어가 만나 빚어낸, 사랑의 집을 향한 조용한 확장이다.
정리=김형범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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