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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순의 문명산책]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2026-03-06 06:00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김중순 계명대 명예교수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날개'는 이렇게 끝난다. 이 문장은 절망의 독백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하늘을 날고자 하는 인류의 태곳적 욕망을 자극한다. 우리는 수없이 추락했으면서도, 다시 날개를 달아 왔다.


이카루스가 그랬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크레타섬의 미궁에 갇혔다.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늘뿐, 그는 깃털 날개를 만들어 밀랍으로 붙인 후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너무 높이 올라 태양에 가까이 가지 말 것이며, 너무 낮게 날아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를 무시하다가, 결국에는 날개가 녹아 바다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스탄불의 갈라타(Galata) 탑에는 또 하나의 날개가 있다. 헤자르펜 아흐메트 첼레비, 그는 비극을 반복하지 않았다. 바람의 방향과 공기의 밀도를 계산하고, 다빈치의 설계도에 따라 날개를 제작했다.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그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질러 위스크다르 광장에 착륙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그에게 큰 상을 내렸지만, 나중에는 위험 인물로 간주해 멀리 알제리로 유배를 보냈다. 비극적 도전자들이다.


이 두 이야기는 같은 날개의 비극을 이야기하지만, 서로 다른 문법을 따른다. 이카루스는 경고의 신화이고, 갈라타는 실험의 은유다. 하늘은 신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질서가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지만, 신이 만든 법칙을 이해하고 검증하는 일까지 금지된 것은 아니다. 초월은 금지되지만 탐구는 허용된다. 비행은 신을 흉내 내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가 법칙 속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용기였다.


그리고 인류는 다시 한번 날개를 달았다. 알고리즘과 연산 능력을 갖춘 AI다. 그것은 더 이상 보조 기구가 아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창작하는 영역까지 넘보는 새로운 존재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이카루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너무 멀리 가서도 안되고, 신의 영역을 넘봐서도 안된다. 그것은 오늘날 AI를 '통제 불능' 혹은 '신이 되려는 인간'으로 경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것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다는 상상은, 기술을 곧바로 신성(神性)의 경쟁자로 만든다. 실험은 탐구가 아니라 위반이 되고, 실패는 학습이 아니라 재앙이 된다.


그러나 AI는 '새로운 신'이 아니다. 인간 지능을 대신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 사고의 방식을 기술적으로 구현한 하나의 구조다. 따라서 AI 시대의 질문은 인간이 신이 되어도 되는지가 아니라, 인간은 자신이 만든 질서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가 되어야 한다. AI의 딜레마는 윤리와 기술의 대립이 아니다. 금기와 실험의 충돌이다. 실험의 허용은 무제한적 방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험이 정당한 탐구의 권리를 획득할수록, 실패는 죄가 아니라 데이터가 된다. 이카루스의 세계에서는 추락이 곧 파멸이지만, 갈라타의 세계에서는 추락조차 학습의 일부가 된다. AI의 위험을 관리하기 위해 불태워야 할 것은 날개가 아니라 무지다.


우리는 다시 미궁을 빠져나와 갈라타의 탑 위에 섰다. 출구는 하늘을 향해 열려 있다. 추락을 두려워하며 날개를 불태울 것인가, 아니면 바람의 방향을 계산하며 한 발자국 더 내디딜 것인가. 기술은 신의 자리를 빼앗는 도구가 아니라, 미궁을 빠져나오게 하는 장치다.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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