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창석 영주시 문화복지국장이 고치령 산령각을 직접 찾아 위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기웅 기자
때아닌 눈발이 소백산 자락을 훑던 영주 고치령에는 500여년 전 복위(復位)를 꿈꾸다 꺾인 사람들의 발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눈이 흩날리던 지난 6일 오후 2시, 경북 영주 고치령 고개는 바람이 얇게 살을 베었다. 소백산 깊숙이 들어앉은 산령각 문을 열자 작은 전각 안쪽에 위패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태백산신'과 '소백산신'. 손창석 영주시 문화복지국장은 "태백산신은 단종을, 소백산신은 금성대군을 뜻한다"며 "억울한 죽음이 영험함을 가져 사람들은 그 한(恨)을 이렇게 기리고 있다"고 했다.
조선 비운의 왕 단종의 생애 마지막을 그려낸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천만 명을 넘어서며, 단종과 금성대군의 애환이 서린 영주 고치령이 재조명되고 있다. 영주는 '단종의 이야기'가 지명과 전설, 옛길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고치령은 가장 서늘한 페이지다. 고치령은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 세 곳 중 '가운데 길'로 꼽힌다. 충북 단양군 의풍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리,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를 잇는 가장 가까운 통로였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단종과 금성대군의 '밀사'가 오갔다는 비운의 통로로,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고치령의 사연은 순흥으로 이어지며 더 짙어진다. 안정면 동촌1리, 별칭 '피끝마을'은 단종 복위 운동의 비극과 맞닿아 있다. 영주시가 집계한 동촌1리 인구는 현재 83세대 133명. 마을 이름의 유래는 잔혹할 만큼 직설적이다.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가 멈춰서 끝난 곳"이라는 이야기다.
손창석 영주시 문화복지국장과 김명자 문화예술과장이 순흥면에 위치한 금성대군신단 비석에 쓰인 글자를 가리키며 읽고 있다. 권기웅 기자
1457년(세조 3년)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로 유배돼 오면서도 단종 복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거사를 도모하던 계획은 시녀 김련과 관노의 밀고로 들통났고, 당시 풍기현감 김효급의 보고로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금성대군은 사사됐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는 처형됐다. 복위의 불씨가 꺼지며 단종도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정축지변'은 그 후폭풍을 더 처참하게 그린다. 안동부사 한명진이 군세를 이끌고 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죽였으며, 한양에서 중기병·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다. "근방 30리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표현이 따라붙는다. 당시 순흥과 주변 호구는 284호 1천679명으로 기록되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희생자가 약 300명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소설 '단종애사'는 순흥의 청다리 아래에서 목이 잘린 이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4km 흘러 멈춘 곳이 지금의 동촌1리라고 묘사한다. 그래서 '피끝'이다.
영주시는 이 비극의 서사를 '기억의 관광'으로 엮는 작업을 시작했다. 박현배 영주시 관광진흥과 담당자는 "올해 9~10월 고치령문화제 개최를 계획하고 있고, 관광객이 '영주 반띵 관광택시'를 타고 영화 속 역사 이야기를 따라 순흥 일대 주요 관광지(피끝마을, 금성대군신단, 부석사, 소수서원, 선비촌)를 둘러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명자 영주시 문화예술과장은 "고치령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때는 물자와 사람이 오가던 길, 한때는 왕을 되돌리려던 사람들이 오가던 길. 잊혔던 고갯길이 영화와 축제, 관광택시를 타고 다시 사람을 맞는다"고 말했다.
권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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