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 영화평론가
백화점에서 두 남녀가 만나 가까워진다. 백화점 재벌과 판매 사원이 사랑에 빠지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명품관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아니고, VIP 고객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영화는 애초에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반짝반짝한 이미지와는 담을 쌓기로 작정한 듯하다.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는 주로 주차장과 물류창고이며, '경록'(문상민)과 '미정'(고아성)도 몇 초마다 한 번씩 불이 꺼지는 컴컴한 지하에서 처음 만난다. 경록은 금발 미녀의 등신대 판넬 뒤로 슬며시 등장한 '미정'(고아성)을 본 후, 계속 그녀의 생각에 빠져든다. 스무살 청년이 첫 눈에 사랑을 느끼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건만 직장 선배인 '요한'(변요한)은 그에게 경고한다. 어긋난 호의, 싸구려 동정, 일회성 휴머니즘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이미 상처투성이인 그녀에게는 동정이 가장 비참한 거라고.
영화 '파반느'의 원작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박민규)는 미정의 첫인상을 '나(경록)는 그녀처럼 못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라고 묘사한다. 영화에서는 못생겼다는 직설 화법보다는 '임팩트가 쩐다'는 대사로 대신한다. 소위 '얼평'이 금기시되는 시대를 의식했을 것이다. 또한 배우 고아성이 연기한 미정은, 20년 전 한 드라마의 '김삼순'처럼, 실제로 못생긴 것이 아니라 못생긴 설정의 인물이고 외모 외에 다른 매력을 충분히 풍기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외모보다 마음이 중요해요'라는 교훈적 동화로 치부해 버리면 곤란하다. '파반느'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공동경비구역을 좁혀보려는 시도이며, 그 위험한 공간을 잽싸게 오가는 동물 같은 수치심에 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현대무용과 클래식 음악 등을 고전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사랑뿐이다'나 '이런 마음 아나요'와 같은 대중가요가 가진 정서적 가치도 다른 예술들과 나란히 위치시킨다. '파반느'는 묻는다.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이 VIP 고객들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잘생긴 남자가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는가.
수치심이라는 테마에는 경록의 남다른 가정사가 따라붙는다. 허우대가 멀쩡했던 경록의 아버지는 무명 배우 시절, 볼품 없는 외모의 식당 주인과 결혼해 경록을 낳았다. 그러나 유명해진 다음에는 조강지처와 아들을 버리고 미모의 사업가와 결혼해 버린다. 스타의 스캔들 속에나 존재하는 혼외자가 되어버린 경록은 아버지를 경멸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는 어머니에 대한 동정이나 호의, 혹은 아버지의 유전인지도 모를 자성(磁性)으로 미정에게 끌려온다. 그에게는 추한 여자와 연인이 되는 것이 그녀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일보다 덜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경록이 아무렇지 않게 미정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 불러내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수치심 없는 행동이야말로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별을 선택하는 것은 미정이다. 경록이 자신과의 스킨십을 은근히 피하는 것을 느낀 미정의 이별통보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였을 것이다.
원작의 복잡다단한 주제와 감정이 압축되어 있긴 있지만, '파반느'는 원작 팬들도 충분히 납득하고 좋아할 만큼 사려 깊은 각색과 영상미를 보여준다. 지독하리만치 모순적인 사랑의 속성을 경험해 본 이들이라면 공감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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