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이주배경인구 20만 명 육박
이주여성들이 채운 한림야간학교 교실
“사각지대 역할은 앞으로도 있다”
민간 야학, 이민 시대 사회 통합의 거점으로
1970년대 산업화의 격변 속에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소년공들을 위해 야학(夜學)이 탄생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 대구·경북은 또 다른 격변기를 맞고 있다. 이른바 '이민 시대'다. 청년인구 유출과 인구 감소가 겹치면서, 타국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지역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시대가 됐다. 야학 교실의 풍경도 달라졌다. 한때 소년공이 앉았던 자리에는 칠순의 만학도가, 그 옆에는 낯선 땅에 첫발을 디딘 이주민이 앉아 있다. 저마다 주경야독의 이유는 다르지만, 문해를 통해 삶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는 점만큼은 반세기 전과 다르지 않다. 다가오는 이민 시대, 야학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현장과 미래 가치를 짚어본다.
경북 이주민 한국어 교육공급 현황. <그래픽 = 생성형AI>
◆ 늘어나는 이주민, 빈틈 메우는 민간 야학
대구·경북의 이주민 지형은 지난 10년간 양과 질 모두에서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통계청과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025년 말 기준 대구경북의 이주배경인구(외국인·귀화자·이민자 2세 포함)는 약 20만명에 육박한다. 대구에서는 달서구와 달성군 등 서남부 산업단지에 외국인이 집중돼 있으며, 경북은 구미·포항·경산 등 제조 거점과 영천·의성 등 농촌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다.
증가 속도는 가파르다. 2021년 약 7만2천 명이던 경북 등록 외국인은 2023년 8만9천명을 거쳐 2026년 초 사상 처음 10만명을 돌파했다. 5년 만에 약 38.8% 급증한 것이다. 이주민은 이제 지역 소멸 위기를 안고 있는 경북 농촌의 인구 공백을 채우는 핵심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노동인구 감소가 심화하는 가운데 대구경북의 이주민 유입은 빠르게 늘고 있고, 광역·기초자치단체도 비자 쿼터 확대와 정주 지원 정책으로 대응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북도가 지역소멸 대응책으로 추진 중인 지역특화형 비자(E-7-4R)다. 경북도는 숙련 인력을 지역에 붙잡기 위한 '정착형 비자' 확대에 나서며 관련 쿼터를 2024년 387명에서 2025년 1천281명으로 약 3.3배 늘렸다. 해당 비자 취득을 위해서는 사회통합프로그램(KIIP) 이수 및 한국어 능력이 필수적이다.
즉, 지역의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교육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통계청과 법무부가 공동 발표한 '2025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에 따르면, 이주민의 약 30%는 한국 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언어 문제를 꼽았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의 30.4%는 한국어를 거의 숙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에 투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급증하는 현장 수요를 행정만으로 온전히 떠받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게 민간 야학이다. 공공이 미처 닿지 못한 시간과 영역에서 야학은 이주민들의 야간 학습 수요를 받아내고,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생활문해의 거점 역할까지 떠안고 있다. 야학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다.
전문가들은 이민 시대 야학의 미래 가치가 문해교육을 넘어 지역사회 통합 기반을 만드는 데 있다고 본다. 지역 내 야학 역사를 연구해온 울산과학기술원 소속 조정봉 박사는 "야학은 공공이 다 감당하지 못하는 시간대와 영역에서 이주민의 학습 수요를 받아내는 보완재를 넘어, 지역민과 이주민이 함께 마주 앉는 드문 공간"이라며 "앞으로 야학은 한국어 교육기관이자 생활 적응, 관계 형성, 사회 통합을 함께 이끄는 플랫폼으로서 의미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19일 오후 7시쯤 찾은 경주 한림야간학교에서 김주현씨를 비롯한 학습자들이 고등학력인정 과정 영어수업을 듣고 있다. 구경모기자
◆ 경주 한림야간학교, 이주민들의 '두 번째 교실'
지난 19일 오후 7시쯤 찾은 경주 한림야간학교 고등학교 학력인정반 교실. 늦은 저녁 시간에도 수업은 한창이었다. 밤 9시50분까지 이어지는 수업인데도 교실에는 50여 명의 학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교실 풍경은 흔히 떠올리는 '야학'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백발의 만학도들 사이로 젊은 청년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는 외국인 학습자였다. 낮에는 가사와 육아, 생업을 감당하고 밤이 되어서야 학교를 찾는 결혼이민자와 이주민들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만난 캄보디아 출신 결혼이민자 김주현(여·34) 씨도 그중 한 명이다. 2014년 한국에 입국해 올해로 12년째 경주에 정착해 살고 있는 김씨가 학교를 찾은 데에는 '생활문해'의 필요성이 컸다. 일상생활은 물론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도 언어의 벽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김씨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제가 아는 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엄마도 공부를 하면서 아이가 배우는 내용을 함께 알고 싶어 학교에 오게 됐다"고 전했다.
김씨에게 한림야간학교는 단순히 학력을 취득하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미 자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한국에서 학력인정 과정을 거친 이력이 있으면 향후 취업이나 진학, 각종 사회활동에서 더 유리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지난 19일 오후 7시쯤 찾은 경주 한림야간학교에서 학습자들이 고등학력인정 과정 영어수업을 듣고 있다. 구경모기자
외국인 학습자들에게 야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에 스며드는 통로이기도 하다. 베트남 출신 주지애(여·36) 씨는 "지역 문화에 대해서도 같이 공부하는 어르신들에게 바로 배울 수 있어 적응하기가 훨씬 수월했다"고 말했다.
지난 19일 오후 7시쯤 찾은 경북 경주시 한림야간학교 입구. 민간야학인 함림야간학교는 올해로 개교 51년째를 맞았으며 재학생은 100여명에 이른다. 구경모기자
◆ 야학의 힘은 '선제성'
한림야간학교 박현미(60) 교감은 25년째 지역 문해교육 현장을 지켜온 인물이다. 자원봉사로 시작해 직접 한글교실을 만들었고, 지금은 학교 운영을 맡는 교감으로 일하고 있다. 박 교감은 야학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로 사회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읽고 대응해 온 점을 꼽았다.
그는 "교육은 시대 변화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데 행정 체계 안에서는 그 흐름을 즉각 포착해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며 "야학 활동가들은 대부분 직장이나 교직 생활을 병행하는 자원봉사자들로, 특정 조직의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현장의 변화를 더 민감하게 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했다.
이민 시대 야학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른 뒤 "야학의 역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는 솔직히 단정하기 어렵다"면서도 "다만 교육 사각지대에서 맡아야 할 역할은 앞으로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25년째 야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도가 설계한 틀 안에서는 쉽게 하기 어려운 일들을 야학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이민 시대에 걸맞은 야학의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주민 수가 늘고 지역사회 안에서 존재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단순한 언어 교육을 넘어 이주민과 지역민이 실제로 접촉하고 교류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영남대 정용교 교수(사회학과)는 "이주민이 지역사회에서 가시적인 존재가 된 이후의 과제는 서로가 익숙해지는 과정을 어떻게 만들어내느냐에 있다"며 "야학은 이주민과 지역 주민이 같은 교실에서 같은 공책을 펼치는 공간으로, 제도만으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자연스러운 접촉의 장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구경모(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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