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0404020288882

영남일보TV

  • [스케치] 대선 후보 출마 방불케한 김부겸 대구시장 출마 기자회견…대구서는 TK 출마자 챙겨
  • 영덕 풍력발전기 화재…점검요원 3명 모두 ‘참변’

[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일왕 즉위식 겨냥한 26세 청년, 그리고 아내의 순절…성주 ‘의열각’이 던지는 시대의 물음

2026-04-04 10:23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의열각 전경 <성주군 박재관 학예연구사 제공>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의열각 전경 <성주군 박재관 학예연구사 제공>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의열각 <성주군 박재관 학예연구사 제공>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 의열각 <성주군 박재관 학예연구사 제공>

조국이 주권을 잃은 암흑기, 일제의 폭압은 스물여섯 열혈 청년의 항일 투지도, 갓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의 애틋한 삶도 모두 앗아갔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옥성리에 고즈넉이 자리한 '성주 옥성리 의열각(경북도 기념물 제140호)'. 이곳은 일제에 온몸으로 항거하다 자결한 이경환(1902~1929) 의사와, 남편의 숭고한 결단을 따라 목숨을 던진 부인 성산 배씨의 한 서린 충절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경환 의사의 항일 투쟁 중 가장 상징적이고 대담한 사건은 1928년 일본 본토 한복판에서 시도된 '교토 의거'다. 당시 일본 교토에서는 쇼와 일왕(히로히토)의 즉위식이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일제는 이 행사를 통해 식민 지배 체제가 완벽한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다.


이 의사는 바로 이 제국주의의 가장 화려한 정치 무대를 정조준했다. 일제의 기만적인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조선총독부의 즉각적인 철폐를 촉구하는 내용의 '직소장'을 일왕에게 직접 전달하려 한 것이다. 최고 수준의 경비가 삼엄하게 펼쳐진 적의 심장부로 뛰어든 이 계획은, 당시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결연한 시도였다.


하지만 거사는 실행 직전 일본 경찰의 치밀한 감시망에 걸려 수포로 돌아갔다. 이 의사는 체포되어 이국땅의 차가운 감방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겪어야 했다.


심각한 후유증을 안고 만신창이가 되어 고향 성주로 돌아왔지만, 그를 더욱 절망하게 한 것은 수탈과 억압이 극에 달한 식민지 조선의 참담한 현실이었다. 결국 1929년 11월, 이 의사는 "원수들의 치하에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는 피 끓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무력으로 국권을 강탈한 일제를 향한 가장 처절하고도 타협 없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의 굳은 의지와 비통한 최후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부인 성산 배씨 역시, 삼일장을 치른 직후 지체 없이 남편의 뒤를 따라 순절을 택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부부의 지조는 당시 지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기며 항일 의식을 일깨우는 강력한 불씨가 되었다.


해방 이후 지역사회는 이들 부부의 죽음을 숭고한 '의열(義烈)'로 묶어 함께 기억해 왔으나, 오늘날 국가의 제도적 평가는 뚜렷한 온도 차를 보인다. 이경환 의사는 그 공훈을 인정받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지만, 부인 배씨의 이름은 여전히 독립유공자 서훈 명부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과거의 보훈 심사 기준이 배씨의 자결을 능동적인 항일 투쟁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에 입각한 '열녀(烈女)'의 범주로 좁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따라 죽은 아내의 도리로만 치부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주체적 역할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배씨의 순절을 바라보는 시각도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식민 지배에 대한 전면적 비협조와 저항의 의미가 담긴 남편의 자결을 온전히 이해하고 실행에 옮긴 배씨의 선택은, 단순한 내조를 넘어선 '부부 공동의 항일 저항'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지역민들은 두 사람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55년 처음 의열각을 세웠고, 1995년 접근성을 고려해 현재의 위치(대가면 옥성리)로 이전했다. 전각 내부에는 부부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으며, 곁에는 이경환 의사의 사적비가 세워져 그날의 뼈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 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일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인구 감소를 겪는 지방의 산간 문화재 특성상, 일상적인 보존에 현실적인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의열각이 단순한 낡은 기념물을 넘어 지역사회의 진정한 정신적 구심점으로 기능하려면 적극적인 '활용' 대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성주 관내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 생가, 백세각 등 다른 독립운동 사적지들과 의열각을 하나로 묶어 역사적 교훈을 얻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역사교훈여행)' 코스 개발이 대표적인 대안이다. 부서지고 외면받던 역사 속에서도 꼿꼿했던 부부의 절개는, 후대의 올바른 기억과 제도적 뒷받침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히 완성될 수 있다.



기자 이미지

석현철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사회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