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도로에서 바라본 페라스토와 코토르 만. 페라스토는 작은 마을이지만 6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두브로브니크를 벗어나니 곧바로 아드리아해를 끼고 달리는 해안도로가 시작됐다. 눈이 시린 바다 때문에 한껏 늑장을 부렸지만 금방 국경이 나타났다. 국경을 넘자마자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도로 상태는 물론, 간판과 건물의 질감도 달라졌다. 그리고 처음 만난 몬테네그로의 도시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였다. 코토르 만 입구의 첫 도시였다. 여기서부터 몬테네그로의 아드리아 해안도로가 펼쳐졌다.
몬테네그로는 서쪽으로 아드리아해와 크로아티아, 북쪽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쪽으로 세르비아, 남동쪽으로 코소보, 남쪽으로 알바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대구경북과 비슷한 1만3천100㎢ 면적에 약 63만 명이 살고 있다. 수도 포드고리차의 인구도 20만 명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 동방정교회를 믿지만 무슬림과 가톨릭도 섞여 있어 나라는 작지만 종교적 포용성은 강하다. 그래서 여러모로 여행하기 좋은 나라이다. 특히 쾌적하고 짧은 동선에 물가도 저렴하여 오래 머물고 싶은 나라로 꼽힌다. 연간 약 270만 명 내외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이유이다. 관광객이 인구의 서너 배가 넘는 셈이다.
코토르 만. 코토르 만 입구의 첫 도시는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였다.
몬테네그로는 9세기 비잔티움 제국의 제후국이었던 두클랴(Duklja)에서 비롯됐고, 11세기 중엽부터 독립하여 제타 공국으로 불렸다. 그 후 다시 라슈가와 통합하여 '몬테네그로'가 됐다. 15세기부터 약 400년간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치를 받다가 1878년에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다. 1918년부터 세르비아에 통합되어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어 1991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속했다. 유고연방이 해체된 후에도 '신유고 연방'의 세르비아에 묶여 있다가 2006년 5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했다.
몬테네그로의 해안도로는 속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왕복 2차선의 구불구불한 도로는 핑계이고, 호수처럼 둥근 만(bay)이 만드는 풍경 때문이었다. 오른쪽은 짙은 코발트색 바다, 왼쪽은 석회암 절벽과 지중해성 관목이 우거진 아름다운 길이 펼쳐졌다. 석회암의 웅장한 산길을 구불구불 달리노라면 산과 바다가 계속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며 시선을 붙잡았다. 누군가는 이곳을 유럽 최남단의 '피요르드'라 불렀다. '침강 하곡'으로 배웠던 리아스식 해안이라는 말이다. 마치 옥룡설산과 하바설산이 만들어낸 중국 리장의 호도협을 뻥튀기해놓은 듯한 모습이다.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이 폭이 좁은 긴 해안선과 깊은 수심을 만들어 바다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잔잔한 수면 위에 작은 마을들이 물가에 바짝 붙어 있었다. 굽이도는 차창 밖으로 연신 돌 지붕의 집과 교회 종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차를 세웠다.
'코토르의 사다리' 트레일에서 바라본 코토르 만. 코토르는 바이런(Byron)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과 바다의 조우"라고 극찬한 도시다.
목적지 코토르를 12㎞ 정도 남기고 풍경에 끌려 멈춘 곳이 마침 제법 유명한 관광지인 페라스트(Perast)였다. 약 400명 정도의 주민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6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마을이 유명하게 된 것은 '바위의 성모(Our Lady of the Rocks)'라는 성화 덕분이다. 1452년 7월22일 이 마을의 어부 형제가 작은 암초 위에서 발견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림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지어 그림을 모시기로 하고 그때부터 수백 년에 걸쳐 어선에다 돌을 실어 나르거나 낡은 배를 가라앉혀 암초 주변을 넓혀 나갔다. 그렇게 조성된 인공섬 위에 성당을 짓고 이 그림을 안치했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전승되어 매년 7월22일에 축제를 연다. 주민들은 보트에 돌을 싣고 섬 주변에 던져 넣는 의식도 행한다.
코토르 만의 인공 섬 위에 있는 페라스트의 '바위의 성모 교회'. 1630년경 재건된 바로크 양식이다.
인공섬에 있는 현재의 성모 교회는 1630년경 재건된 바로크 양식으로, 내부에는 은판 그림 봉헌물 약 2천500점이 벽면을 두르고 있다. 무사 항해를 기원하며 바친 은판 성화로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이 담긴 그림들이다. 이 외에 한 여인이 25년에 걸쳐 자신의 머리카락을 짜 넣어 완성한 자수 태피스트리도 유명하다. 귀환을 기원하는 기다림과 신앙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인공섬 옆에는 또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 조르제 섬이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이 섬에 주둔하던 프랑스 병사가 자신이 쏜 대포에 이 마을에 사는 자신의 연인이 죽자 깊은 죄책감에 빠져 수도사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이 묻힌 조르제 섬의 수도원에 머물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원래 베니딕트 수도회의 수도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무인도이다.
'코토르의 사다리' 트레일에서 바라본 성 요한 요새. 이 요새를 기반으로 12~14세기 네만리치 왕조가 주요 방어시설을 축조했다.
체크인 시간 때문에 멀리서 교회가 있는 인공 섬만 보고는 곧장 코토르로 출발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Byron)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과 바다의 조우"라고 극찬한 도시가 코토르이다. 코토르 만의 아름다운 풍경은 바이런의 말이 허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을 키웠다. 코토르는 좁은 골목길이 엉킨 중세 성벽도시이다. 성 안에 숙소를 잡아서 주차는 성 밖 공영주차장을 이용해야 했다. 꼭 필요한 짐만 캐리어에 챙겨 성벽 안 숙소로 갔다. 돌다리로 연결된 성문을 들어서니, 타임슬립한 것처럼 고풍스러운 중세도시가 나타났다. 울퉁불퉁한 포석 때문에 캐리어가 요동쳤지만 숙소로 이동하는 잠깐 동안의 골목 풍경이 꽤 묵직하게 다가왔다. 문득 고개를 드니 아득한 산이 시야를 막았다. 심지어 산 위에는 만리장성처럼 긴 성벽이 늘어서 있었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요새를 가진 높은 산. 바이런이 말한 '땅과 바다의 조우'였다.
코토르 도시 성벽에서 이어지는 로브첸 산의 성벽 요새. 거대한 석회암의 이 산은 몬테네그로의 역사적·문화적·지리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19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바이런이 만난 땅은 가파른 절벽을 가진 로브첸 산이었고, 바다는 아드리아해가 만든 코토르 만이다. 그는 "지구가 탄생하던 순간, 땅과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몬테네그로 해안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자연의 진주가 뿌려질 때, 그 진주들이 이 땅에 뿌려졌다"라고 감탄했다. 이 어록은 현재 코토르와 몬테네그로의 아름다움을 홍보하는 문구로 자주 인용된다. 코토르의 극적인 자연경관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명 'Montenegro'는 베네토어로 '검은 산'이란 뜻으로, 코토르를 막아선 로브첸 산을 가리킨다. 코토르 만 바로 뒤편에 솟아 있는 거대한 석회암의 이 산은 몬테네그로의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19세기 몬테네그로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군주 페타르 2세(Petar Ⅱ)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이 산의 꼭대기에 묻혔다. 바다에 묻혀 나라를 지키겠다는 몬테네그로 판 문무대왕인 셈이다. 차이가 있다면 문무대왕이 바다를 통해 오는 왜구를 걱정했다면 페타르 2세는 산을 넘어오는 오스만제국을 염려했던 것이다.
코토르 구시가 골목길. 1979년 대지진으로 구시가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지만 지금은 복구가 됐다.
코토르는 기원전부터 일리리아(Illyria) 왕국이 있었으며, 도시 역사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됐다.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는 이곳에 요새가 건립되기도 했다. 16·17세기에 잠시 오스만제국의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15세기 초부터 18세기 말까지 줄곧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아 베네치아풍의 도시가 건설됐다. 1979년 몬테네그로 해안 지역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구시가지의 절반 이상이 파괴됐지만 지금은 복구가 됐다.
코토르 도시 성벽과 로브첸 산. 코토르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자 보호막이었다.
코토르의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는 코토르 만 뒤로 펼쳐진 '검은 산' 로브첸 산과 그 위에 쌓은 성벽과 요새이다. 코토르 해안을 병풍처럼 둘러싼 가파른 산들은 코토르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자 보호막이었다. 이 산 위에는 고대 로마 시대부터 요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요새를 기반으로 12~14세기 네만리치 왕조가 주요 방어시설을 축조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증축되고 보수되어 4.5㎞에 달하는 지금의 요새 성벽이 완성됐다. 따라서 거의 1천년 동안 만들어진 성벽과 요새라 할 것이다.
이 성벽은 독특한 지그재그 모양으로 유명하다. 바다에서 곧장 260m 높이까지 솟아오른 가파른 로브첸 산비탈의 험준한 산악 지형 때문이다. 그 정상에는 성 요한 요새(St. John Fortress)가 있다. 17세기 오스만제국의 침입을 두 달 동안이나 막아낸 것도 이 성벽과 요새 덕분이었다.
코토르 구시가 골목길과 로브첸 산. 일반적으로 구시가지 동쪽 입구에서 지그재그 계단 길을 따라 성벽 요새를 오른다.
짐을 풀고 이곳부터 오르기로 했다. 성벽 요새를 오르는 길은 두 가지이다. 구시가지 동쪽 입구에서 1천300개가 넘는 지그재그 계단 길을 따라 오르는 것이 일반적 경로이다. 입장료가 15유로이다. 게다가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계단이어서 교행이 불가능하다. 사람이라도 만나면 멈춰서 길을 터주거나, 아예 옆의 흙길로 내려서야 한다. 우리는 '코토르의 사다리'라 불리는 우회로를 택했다. 70개의 굽이 길이 지그재그로 이어진 트레일로, 과거 노새가 다니던 산길이다. 입장료도 없는 데다 무엇보다 무릎 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돌이 깔린 오르막을 느릿느릿 오르니 코토르 만의 아름다운 바다가 조금씩 땅의 풍경을 내어주었다. 굽이 돌 때마다 조금씩 땅이 넓어지고 집도 많아졌다. 마지막 굽이를 돌고 나서야 코토르의 바다와 땅이 어떻게 만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코토르는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주둥이가 수줍게 바다에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형상이었다.
성 유라이 교회 창문에서 바라본 성벽 요새. 교회 내부의 프로스코화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어느 순간 평탄한 길에 제법 넓은 고원이 나타났다. 그리고 먼저 눈이 닿은 곳은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뚝 솟은 아담한 교회였다. 지금은 폐허가 된 슈필자리 마을의 성 유라이 교회(St. Juraj Church)였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돌로 지어진 외양은 기도 소리가 갓 그친 듯 의연했다. 내부를 들어가 보니 낡은 프레스코화와 파란색의 지붕 파편도 여전했다. 교회 반대편 아래쪽에 남겨진 부서진 돌집 유적을 보니, 여러 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보였다. 이곳은 코토르에서 로브첸 산을 넘어 체티녜(Cetinje) 방면의 내륙으로 이어지는 고대 산악 교역로의 중간 지점이었다. 이 마을은 과거 상인이나 여행자, 군인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주막 같은 역할을 했다. 지금은 카페 하나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데, 비수기여서 문이 닫혀 있었다.
폐허가 된 성 유라이 교회.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돌로 지어진 외양은 기도 소리가 갓 그친 듯 의연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