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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珍의 미니 에세이] 초분(草墳)

2026-04-24 06:00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박기옥 수필가·대구문인협회 부회장

가까운 듯 먼 섬이 있다. 청산도이다.


남쪽 끝까지 5시간 이상 차를 타고 나가서 다시 배를 1시간 가량 타야 하는 곳. 섬은 멀리 있다. 제주도도 아닌 것이, 울릉도도 아닌 것이.


날씨가 좋았다. 완도항을 떠난 지 50여분 만에 배는 무사히 청산도 도청항에 도착했다. 하늘이 환하다. 바다도 파랗다. 산도, 들도 온통 파랗다. 이름 그대로 '청산도(靑山島)'다.


팔을 흔들며 느릿느릿 섬을 밟는다. 청산도는 국제 슬로시티 연맹으로부터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지정된 섬이다. 슬로(slow)는 단순히 느림의 의미를 넘어서 나 자신을 귀히 여겨 느긋하게 산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서편제 길을 지나고 당리를 거쳐 구장리에 이르자 시선이 딱 멈추는 곳이 있다. 다랭이 논 가운데 살포시 자리 잡은 초분(草墳)이다.


초분은 말 그대로 풀무덤이다. 시신을 땅속에 묻기 전 3년 동안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뼈를 추려 묘를 쓰는 장례법이다. 세속에 찌든 육신을 땅에 바로 묻는 건 선산에 대한 예가 아니어서 육탈을 하고 뼈만 남을 때까지 땅 위에 두는 풍습이다.


지금 내가 만난 초분은 상태가 좋다. 용머리에 꽂힌 솔가지가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자식들이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볕든 자리에 편안하게 자리 잡은, 아늑한 초가집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젊은 커플들은 초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초분에 기대어 V자를 날리며 스마일 사진을 찍는 청소년도 있다. 저들에게는 초분이 기념품이거나 장난감 정도일까.


초분은 이제 청산도에서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자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판국에 두 번씩이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나마 청산도이기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청산도 토박이들은 고향에 묻힐 때는 초분을 원한다고 한다. 차가운 땅속에 들어가기 전 삶의 터전이었던 고향의 햇살과 바람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것이 망자의 소망이리라. 그러고 보면 초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마지막 끈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죽음은 생의 다른 얼굴이 아니던가. 생과 사가 한자리에 모여 바람처럼 잠시 머묾으로써 망자와의 연(緣)마저도 느리게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죄송합니다만, 사진 좀~"


젊은 부부가 아이를 안고 스마트폰을 내민다.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잡더니 아이를 아예 초분 용머리 위에 앉힌다. 나도 모르게 기겁하여,


"안 돼요! 아빠가 안으세요!"


누워 있는 사람이 벌떡 일어날까 봐 셔터를 얼른 눌렀다.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관 속에서 호통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나는 서둘러 도청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출발을 알리는 일행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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