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복 공인회계사
판단은 가까운 곳에서 흔들린다. 이해관계 속에 들어가는 순간, 판단은 더 정확해지기보다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판단은 정보의 양보다, 어디에 서 있는가에 좌우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를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라고 불렀다. 판단은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니체 관점에서 보면 판단이 흔들리는 이유는 역량 부족이 아니라, 판단이 놓인 위치가 지나치게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회계 전문직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회계사는 기업과 계약 관계를 맺고 보수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기업의 재무정보를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용역 제공자가 용역 의뢰인을 평가하는 특별한 구조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더 많은 정보나 기술이 아니다. 판단의 위치를 한 걸음 물리는 거리(distance)다. 회계사들이 중시하는 '독립성'은 결국 이 거리를 확보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이 거리는 쉽게 무너진다. 고객 요구에 분별없이 동조하거나 시장 흐름에 휩쓸리는 순간, 판단의 방향은 기울어진다. 형식적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실질은 달라질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말한 '노예 도덕'은 이러한 상태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이미 형성된 기준에 맞춰 움직인다. 거리가 사라진 자리에서 판단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독립성은 단순히 규정을 충족하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판단이 가능한 위치를 스스로 확보하고 유지하는가의 문제다. 얼마나 떨어질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거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멀어지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책임 있는 판단은 거리와 몰입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데서 나온다고 보았다. 지나치게 가까우면 판단이 왜곡되고, 지나치게 멀어지면 현실과 분리된다. 중요한 것은, 거리를 끊는 것도 거리를 과도하게 유지하는 것도 아니라, 거리를 유지한 채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구조는 회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법조인은 여론과 거리를 유지해야 하고, 언론은 권력과 대중 모두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확보해야 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판단의 조건은 같다. 거리가 있어야 판단이 가능하다. 전문가는 더 많은 지식을 가지기에 앞서 더 큰 거리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거리를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정보는 빠르게 확산되고, 여론은 즉각적으로 형성된다. 사람들은 숙고하기보다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내며, 판단의 간격은 점점 짧아진다. 그만큼 판단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진다.
독립성과 판단은 규정이나 선언만으로 지켜질 수 없다. 그것을 작동시키는 조건은 거리다. 거리가 확보될 때 판단은 방향을 유지하고, 거리가 무너질 때 쉽게 기울어진다.
이는 회계 전문직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전문직 종사자는 이해관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고, 일반인 역시 조직과 사회 속에서 자신의 판단 위치를 늘 돌아보며 점검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갖는 것보다, 판단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각하는 일이 더 우선이다.
판단은 거리 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그 거리를 잃는 순간, 판단은 함께 흔들린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