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어린이들을 위한해 열린 '상주박물관 봄봄 쌀롱'에서 열린 백원장.<상주박물관제공>
1950년 6월 12일 서울 남대문로에서 설립된 한국은행은 전쟁이 터지자 대전으로, 다시 대구로 이사했다. 한국은행은 당시에 보유하고 있던 조선은행권(일제가 발행)이 전쟁자금으로 쓰기에 부족하자 천원권과 백원권을 발행했다. 최초의 한국은행권이다. 화폐발행시설이 없어서 일본대장성인쇄국에 의뢰, 천원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을, 백원권에는 광화문 사진을 넣어 인쇄했다. 이렇게 만든 은행권은 1950년 7월 13일 미군용기로 공수하여 22일 피난지 대구에서 최초로 발행, 유통됐다.
경북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에 백원 마을이 있다. 물론 이 백원은 대구에서 발행된 최초의 한국은행권 100원과는 관련이 없다. 이 마을은 백원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는 장이 섰으며, 기차역에 초등학교까지 있다. 면(面)도, 리(里)도 아닌 자연부락 백원(白元)에 백원장과 백원역, 백원초등학교가 있는 것이다. 1924년 백원역이 세워진 후 마을이 형성되고 유동인구가 늘어나 장이 섰다. 백원초등학교는 1949년 외서초등학교 백원분교로 설립됐다가 1953년 백원국민학교로 승격했다. 인구 감소로 농촌지역의 학생 수가 크게 줄었으나 이 학교는 49명의 학생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상주시의 면지역 초등학교 중 가장 많은 학생 수다.
백원역은 백원초등학교와 같은 마을에 있으나 행정구역으로는 사벌국면 원흥리에 속한다. 2005년 인근에 있는 흥진광업소가 폐광되고 화물수요가 줄어들자 2007년 화물취급이 중단되고, 2008년에 문을 닫았다.
백원장은 훨씬 전부터 서지 않는다. 그런데, 2005년 백원역 앞에 장이 다시 부활했다. 기획력 있는 젊은 교사가 마을 주민들과 협력하여 백원장을 다시 열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백원역 앞에 주민들이 가꾼 채소와 곡물을 파는 전이 펼쳐지고 새끼장식과 매듭 등 어르신들의 작품과 도예작품 등이 30여 개의 점포에 진열됐다. 풍물과 지역연예인들의 공연 등 흥겨운 놀이도 펼쳐졌다. 백원장의 특징은 100원이다. 몇 백원짜리 물건이 많은데다, 1천원이 넘는 물건 값에는 100원을 끝다리로 붙였다. 5천 100원, 1만 100원 하는 식이다. 백원장의 정체성을 위해 물건값에서 에누리를 깎아주는 것이 아니라 100원을 붙였다. 이 100원은 이웃돕기에 썼다.
백원장에 모래언덕에서 어린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백원장 운영위원회 제공>
11년이 흐른 지금, 백원장은 강산이 변한 만큼 진화했다. 물건을 거래하고 흥을 즐기던 데다 예술과 행복을 더했다. 장날도 월 단위에서 계절로 바뀌었다. 장꾼도 예술인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장터도 백원역 앞에 고정되지 않는다. 축제장이나 학교박물관·고택·공원·도서관 등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필요하고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장터가 된다.
그러나 100원의 가치와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
"100원의 전통은 지키고 있습니다. 캐리커처도 그려 주는데, 그 값이 1천 원이면 '열 100원'이라고 합니다."
백원장 운영위원인 김수박 화가는 "정해진 가격 대신 '행복을 느낀 만큼' 후원금을 내는 등 마음과 행복을 나누는 장터, 수익 대신 행복과 예술을 나누며 지역 곳곳을 찾아가는 유연한 문화장터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는 물가변동이 워낙 심해 대구에서 최초로 발행된 100원권의 당시 가치는 짐작하기 어렵다. 백원장에서의 100원의 가치 역시 규정짓기 어렵다. 여기서는 행복과 예술, 흥이 거래되기 때문이다.
김 화가는 "여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백원역에도 기차가 설 수 있을 거야라는 비현실적인 꿈을 모토로 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인구가 계속 줄어서 기차가 설 가능성도 점점 더 낮아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 아니냐 그런 마음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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