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인(音流示人). 음악을 흘려 당신을 봅니다. 음악이 우리 삶과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소리 너머에 있는 인간의 감정과 시대를 살펴봅니다.
AI 시대가 도래하며 음악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완성될 음악이 어떤 콘셉트를 가져야 하는지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더 이상 기타 코드나 화성학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생성형 음악 AI를 소개하는 문장들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Suno와 같은 서비스는 텍스트 몇 줄만 입력하면 완성도 높은 노래를 만들어준다. "몽환적인 여성 보컬의 인디팝" "1980년대 신스팝 스타일의 여름 노래" "비 오는 밤의 재즈 발라드". 장르와 분위기, 가사만 입력하면 몇 초 만에 음악이 탄생한다.
실제로 이제 음악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기타 코드를 알거나, 화성학을 공부하거나, 악보를 읽을 수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AI는 음악 초보자에게 창작의 문턱을 크게 낮추었고, 많은 사람에게 "나도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심어줬다.
이런 변화는 단지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음악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작곡가는 머릿속의 소리를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살아오며 들은 수많은 소리와 음악, 기억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 안에 사유화(私有化)된 감각과 정서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음향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선율과 화성, 구조와 시간 속으로 옮긴다.
반면 이제는, 완성될 음악이 어떤 콘셉트와 스타일, 어떤 분위기나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를 텍스트로 입력한다. "따뜻하고 달달한 한국 드라마 음악 같은 연출" "피아노, 현악기 중심의 클래식한 발라드" "후렴에서 감정이 크게 터지고, 마지막은 담담하게 끝날 것". 이 과정은 엄밀히 말해 음악을 직접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작곡가에게 원하는 결과를 설명하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AI가 제시하는 여러 결과 가운데 하나를 골라내는 모습은 클라이언트(client, 고객・의뢰인)에 가까워 보인다.
음악 창작에서도 AI 활용을 두고 창작의 주체와 인정 범위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게티이미지뱅크>
'AI로 만든 음악을 과연 순수한 창작물로 볼 수 있는가' '텍스트가 있기에 애초에 가능한 창작이지 않느냐' '음악은 결국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 등 AI를 활용한 창작에서는 이처럼 창작의 주체와 창작물의 인정 범위를 둘러싼 논의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논의와 별개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작곡가가 손수 음악을 만들든, AI를 활용하든, 세상에 내놓을 최종 작품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같은 AI를 써도 누구는 평범한 결과에 만족하고, 누구는 원하는 소리가 아니라며 계속해서 텍스트를 수정・보완한다. 어떤 사람은 '슬픈 피아노곡' 정도의 막연한 설명에 머물지만, 어떤 사람은 화성의 색채, 곡의 전개까지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결과의 차이는 AI의 성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결국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용자가 얼마나 구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가 하는 점이며, 그 기준은 개인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음악적 경험과 통찰, 안목에서 비롯된다. 모국어의 어휘가 넓을수록 외국어도 더 풍부하게 구사할 수 있다. AI 역시 아는 만큼 사용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진 음악 세계의 깊이와 넓이, 그 범위가 곧 AI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의 범위다.
"이건 AI로 하면 돼."
예술은 취향과 지극히 사적인 감상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클리셰와 문법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썰매 방울에서 유래한 타악기 슬레이벨(sleigh bell)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특히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의도한 감정과 분위기로 이끌어야 하는 매체음악에서는, '이런 분위기엔 이런 음악'이라는 공식이 비교적 분명하다.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에는 낮게 깔리는 음향과 불협화음이, 눈물 나는 장면에는 서정적이고 잔잔한 피아노가 사용되는 식이다.
음악극과 오페라에서부터 오늘날의 영화・광고・게임에 이르기까지, 음악은 오랜 시간 인간의 상황과 감정을 소리로 묘사해왔다. AI는 이러한 음악을 통해 장르나 스타일이라는 음악의 표면적 특징만이 아니라, 어떤 음악이 어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어떠한 감정을 유도하는지에 대한 방식과 패턴까지 학습하고 있다. 그래서 '슬픈 분위기' '음산한 분위기' '따뜻한 느낌' 같은 다소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요청에도, AI는 오랫동안 축적된 문법 속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하고 관습화된 음악적 표현을 매우 능숙하게 제시한다.
AI 역시 '작품'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동시대의 또 하나의 작곡가일 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이제 제작자는 '공포영화에 삽입할 음악을 만들어줘' '따뜻하고 감동적인 광고 음악 만들어줘'라고 입력하며 직접 음악을 만들 수 있다. 더 나아가 영상을 그대로 업로드한 뒤, 장면의 분위기와 음악의 필요를 분석해 적절한 음악을 삽입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원하는 결과가 아닐 때마다 작곡가에게 다시 설명하고 재작업을 요청할 필요도 없다. 만족할 때까지 텍스트를 수정하기만 하면 된다. AI가 만든 음악과 사람이 만든 음악 사이에 질적 차이가 크지 않다고까지 느껴진다면 시간과 비용, 의사소통의 부담을 줄여주는 쪽이 충분히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결국 AI가 잠식하고 있는 것은, '과정'이다. 짧은 시간 안에 결과를 만들고, 빠르게 수정하며,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이 경쟁력이었던 작곡가에게, 단 몇 초 만에 수어개의 결과를 끊임없이 내놓는 이 존재의 등장은 분명 위협적이다. 음악이 오직 실용적 목적과 기능만을 위해 존재하고, 작곡가가 그저 빈자리에 알맞은 소리를 채워 넣는 역할 정도로 소비된다면, 사람들은 AI의 효율과 효능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AI는 이미 인간보다 더 유능한 '기능자'다.
"이건 AI가 할 수 없어."
필자를 비롯한 오늘날 작곡가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등 음악사 속 작곡가의 음악이 여전히 건재한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작품이 선택되고 기억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 그들이 이미 AI와 같은 존재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진대, 이제 와 AI가 등장한 것이 뭐 그리 새삼스러운 일일까.
작품이 선택되는 이유에는 실용적 쓰임새일 수도, 예술적 가치일 수도, 그밖의 여러 이유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음악은 인간의 '감상'을 벗어날 수 없고, 그것을 남기고 지우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몫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통찰과 안목, 그리고 시대의 감수성 속에서 선택되고,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유산으로 남아왔다.
이러한 측면에서 AI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결국 '과정'이 아닌, '작품'으로 가치를 평가받는 동시대의 또 하나의 작곡가일 뿐이다. 음악을 예술적 가치와 사유・해석의 영역에서 바라볼 때, 작곡가에게 작품이란 자신의 시간과 감각, 경험을 통해 도달하는 하나의 경지에 가깝다. 이러한 시선 위에서 창작은 효율과 효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효율과 집요함 속에서 지극히 사적인 상상을 고유한 소리로 빚어내는 외로운 사투다.
작곡가의 경쟁력은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있지 않다. 절대적인 작곡 능력의 우위를 증명하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 경쟁력이라 함은, 오직 자신의 예술이 가진 고유함을 지키고 확장하며, 그리고 그 가치를 설명하고 설득해 자신의 예술을 사랑해줄 '나의 대중'을 만들어가는 데에 있다.
AI가 할 수 없는 음악이라면, 바로 그러한 '나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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