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봉평신라비, 우연에서 시작된 위대한 발견
“작은 비석에 담긴 신라의 법과 질서…지금도 유효한 기록”
경북 울진군 죽변 봉평리에 봉평신라비 전시관 모습.<원형래기자>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동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벗어나 조용한 마을로 들어서면,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멈춘 듯한 공간이 펼쳐진다. 그 한켠에는 1천500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 하나가 묵묵히 서 있다. 바로 신라 초기 지방 통치의 실상을 보여주는 봉평신라비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이 비석은 오히려 그 소박함 속에서 더 큰 역사적 울림을 전한다.
울진 죽변면은 15개 리에 약 5천800여 명이 거주하는 동해안 대표 어업 중심 지역이다. 수산업과 원전 산업이 공존하는 이곳은 현대 산업과 전통 어촌의 삶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어촌 마을에서 신라의 통치 흔적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울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단순한 어업 지역을 넘어 오랜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인 공간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봉평신라비가 자리한 공간은 화려한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다. 보호각 안에 놓인 비석은 소박한 모습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표면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람과 비를 견디며 오랜 시간을 지나온 비석의 표면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글자들이 남아 있다. 그 글자 하나하나는 6세기 신라의 행정과 질서, 그리고 국가의 통치 방식을 오늘날까지 전해주는 기록이다.
울진 봉평리 전시관 안에 봉평 신라비가 전시된 모습.<원형래기자>
봉평신라비는 단순한 기념비가 아니다. 신라 법제사의 '실물 법전'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비문에는 반란과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해 60대, 100대의 장형(杖刑)을 내리는 내용과 함께, 새로 편입된 주민을 차별적으로 다루는 '노인법(奴人法)'이 명시돼 있다. 이는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이후, 중앙정부가 지방 사회에 법을 적용해 통치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특히 이 비석은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개인 간 재산 분쟁을 다룬 민법적 성격이라면, 봉평신라비는 국가 차원의 반란 진압과 형벌을 기록한 공법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뚜렷하게 구분된다. 이는 신라가 단순한 부족 국가를 넘어 법과 제도를 갖춘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1천500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낯설지 않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규칙, 그리고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와 현재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 사회의 본질은 이어져 있다. 봉평신라비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존재다.
문화유산 연구자 심현용 박사는 봉평신라비의 가치를 '지방 통치의 실증자료'로 설명한다. 그는 "봉평신라비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당시 행정과 법 집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라며 "지방에서 발생한 문제를 국가가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강조했다.
전시관 안에 울진 봉평 신라비 탁본 모습.<원형래기자>
또한 "다른 신라 비석들이 왕권이나 업적을 강조하는 데 비해 봉평신라비는 실제 생활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며 "울진이 신라의 동해안 진출 거점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한 보존을 넘어 교육과 체험 중심의 콘텐츠로 활용한다면 지역 관광 자산으로서 큰 가치가 있다"고 덧붙였다.
봉평신라비의 발견 과정 역시 하나의 역사로 남아 있다. 1988년 초, 논 경지정리 과정에서 땅속에 거꾸로 박혀 있던 돌이 발견됐다. 농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포크레인으로 뽑혀 하천에 버려졌던 이 돌은 이후 우연히 다시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됐다.
돌의 형태가 반듯하고 눈길을 끌자 마을 주민이 정원석으로 사용하려고 다시 옮기는 과정에서 표면에 새겨진 글자가 발견됐다. 주민의 신고로 행정기관이 확인에 나섰지만 초기에는 단순 낙서로 판단돼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다시 현장을 찾은 담당 공무원이 글자의 의미를 확인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이후 탁본과 학계 자문을 거쳐 이 돌이 신라시대 비석으로 밝혀졌고, 언론 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됐다. 버려질 뻔했던 돌 하나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심현용 박사가 봉평신라비 전시관 사무실에서 인터뷰 모습.<원형래기자>
마을 주민들의 기억 속에도 이 비석은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
봉평리에 거주하는 이재만(80) 주민은 "처음에는 그냥 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문화재라고 하니까 다들 깜짝 놀랐다"며 "지금은 우리 마을 자랑거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예전에는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지금은 외지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며 "아이들 교육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잘 보존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봉평신라비는 울진의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드러낸다. 울진은 단순한 어촌이 아니라 과거 신라의 동해안 전략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해상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지방 통치 거점이라는 역할이 이 비석을 통해 확인된다. 지역 정체성 역시 이 유산을 통해 다시 정립될 필요가 있다.
현재 봉평신라비는 보호 중심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활용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단순 관람을 넘어 역사 해설 프로그램과 체험형 교육 콘텐츠, 지역 관광과 연계한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산업 중심 이미지가 강한 울진에 역사문화 콘텐츠를 더하는 것은 지역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울진군과 포항시는 '신라 동해안 3비(울진 봉평리비, 포항 냉수리·중성리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위해 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 3비는 신라의 율령 체계 정비와 고대 국가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핵심 공문서 금석문으로, 모두 국보로 지정돼 있다.
양 지자체는 경북문화재단 문화유산원과 협력해 시민 참여 현장답사를 진행하는 등 지역사회 공감대 확산에 나섰다. 올 하반기에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등재 논리와 전략을 구체화한 뒤, 연말까지 국가유산청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신라지배 체제 전환기의 동해안3비가 유네스코에 등재하기위한 응원문구란.<원형래기자>
'신라 동해안 3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금석문 판독과 학술 검증, 국제 비교 연구 등을 통해 등재 준비가 진행되고 있으며, 국제학술대회와 연구자료 축적을 통해 세계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 사업이 성공할 경우 봉평신라비는 단순한 지역 문화재를 넘어 세계적인 기록유산으로서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울진 역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될 것이다.
봉평신라비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에 새겨진 기록은 지금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울진 봉평에서 만난 작은 돌 하나는 오히려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과거에서 현재로, 다시 미래로 이어지고 있다.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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