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의 질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숙면을 위해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직장인 정다은(28)씨는 최근 나만의 '수면 루틴'을 만들었다. 경추베개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뉴에이지 음악을 튼다. 최근에는 자는 동안에도 스마트워치를 착용하고 수면 시간과 패턴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잠을 얼마나 깊이, 오래 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정씨는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며 "다음 날 또 업무를 처리하려면 잠이라도 제대로 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숙면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면 효율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이른바 '슬립맥싱'(Sleepmaxxing) 열풍이 불고 있다. 수면의 질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숙면을 위해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트렌드가 뜨고 있다. 수면이 부족한 사회에 '잘 자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자기관리 영역으로 인식되며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에 수면 관련 산업과 콘텐츠도 급성장하는 추세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수면 시간은 7시간 내외다. 대한수면학회의 '한국인의 수면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은 6시간58분이다. 이는 OECD 평균(8시간27분)에 크게 밑도는 수준으로, 일본과 함께 세계 최하위권에 속한다. 국내 수면 장애 환자도 130만명을 넘어섰다. 수면 부족·장애의 원인으로는 스마트폰, 야근, 스트레스 등이 언급된다.
'슬립맥싱' 열풍으로 침구류 등 관련 산업도 성장하고 있다. 지난 2011년 4천800억원 수준이었던 국내 수면시장 규모는 지난해 5조원으로 성장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잘 자는 것도 자기관리"…침구류·건강식품 수면산업 급성장
수면 부족과 수면장애가 늘어나면서 숙면을 돕는 생활용품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지난 3일 한국수면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2011년 4천800억원 수준이었던 국내 수면시장 규모는 2021년 3조원으로 10년 새 6배 이상 커졌고, 지난해에는 5조원으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오래 자는 것을 넘어 '얼마나 질 좋게 자느냐'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있다. 직장인 김성현(32)씨는 "요즘은 푹 자는 것도 자기관리라고 생각한다. 오래 자더라도 개운하게 자야 다음날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면서 "최근 침구를 바꾼 것을 시작으로 수면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까지 챙기며 수면 건강에 투자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침구·베개류의 소비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지난해 1~8월 리빙 카테고리 매출 1위 품목은 '베개'로, 전통적으로 1위를 지켜온 가구를 제쳤다. 익명을 요청한 한 생활용품 브랜드 관계자는 "예전에는 단순히 푹신한 베개를 선호했다면, 최근에는 숙면을 위해 자신에게 맞는 제품을 찾는 '베개 유목민' 고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써봤는데 또 다른 제품은 없느냐'고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이어 "모양은 같지만 높이를 다르게 한 베개, 경추베개 같은 기능성 제품의 출시 또한 늘고 있다"며 "회사 차원에서는 손해 요소가 있지만 고객들의 세분화된 니즈를 맞추기 위해 제품군을 다양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몬스 침대의 최상위 라인인 '뷰티레스트 블랙'. 서울 잠실 롯데백화점에서 오는 31일까지 팝업 스토어를 연다. <시몬스 침대 제공>
대중적인 '가성비' 제품은 물론 프리미엄 제품 역시 주목받고 있다. 호텔 침구 브랜드 '더 조선호텔'은 최근 몇 년간 두 자릿수 매출 증가 흐름을 이어가는 중이다. 프리미엄 침대 시몬스는 '뷰티레스트 블랙'을 앞세워 침대 시장에서의 존재감을 굳건히 하고 있다. 지난해 15억여원의 연구개발비를 투입해 전년 대비 21% 증액하고 인건비도 10% 늘려 제품 경쟁력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마그네슘·멜라토닌 등 수면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진 건강기능식품도 관심을 모은다. 지난해 올리브영의 건강기능식품 구매자 수는 전년 대비 315% 증가했다.
지난 19일 인스타그램에 '슬립맥싱'을 검색하니 나온 게시물들. <인스타그램 캡처>
◆스마트 기기로 관리 쉬워져 더욱 관심…관련 콘텐츠도 인기
슬립맥싱 열풍의 또 다른 배경에는 디지털 기반 수면 관리 문화의 확산이 자리한다. 스마트 기기와 앱·플랫폼이 발달하며 자신의 수면 상태를 더 효율적으로 분석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수면 앱 '나이틀리' '슬립사이클' 등은 수면 패턴을 분석해 수면 점수를 제공한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워치의 경우 센서를 통해 수면 중 뒤척임과 렘수면(수차례 안구가 급속히 움직이는 것이 관찰되는 수면단계)을 측정해준다.
현대인들이 '잘 자는 삶'에 집중하면서 SNS에도 슬립맥싱 방법이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지난 19일 인스타그램에 '슬립맥싱'을 검색하니 '슬립맥싱 체크리스트' '숙면 감도 올리는 수면템' '슬립맥싱 멜라토닌 추천템' 등의 게시물이 나왔다. 빗소리나 장작 타는 소리 등이 담긴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콘텐츠는 이미 하나의 수면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김씨는 "ASMR을 들으며 자기 위해 광고 없이 화면을 꺼도 영상이 재생되는 '유튜브 프리미엄'까지 구독했다"고 말했다.
잠을 자기 위해 별도의 공간을 찾는 사례도 나타난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점심 시간 카페형 휴식 공간이나 만화카페 등을 찾아 짧은 쪽잠을 자는 경우가 늘고 있다. 대구 동성로에 위치한 만화카페 '놀숲' 관계자는 "평일 점심시간이면 누울 수 있는 좌석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가는 직장인 손님들이 적지 않다"며 "만화책을 보지 않고 휴식 공간처럼 이용하는 경우가 늘었다"고 전했다.
템퍼 에르고 플러스 베개(밑)와 오리지널 베개. <템퍼 제공>
◆제품에 과한 의존은 경계해야…가장 중요한 건 '수면 위생'
다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슬립맥싱 열풍이 수면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ASMR, 건강기능식품, 수면 측정기 등은 숙면에 일정 부분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를 맹신하거나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오히려 수면 스트레스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사공정규 포항채움의원·사공정규마음치유아카데미 원장(전 동국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잠조차 성과주의처럼 평가받는 사회가 됐다"고 꼬집었다. 사공 원장은 "일례로 실제 체감하기로는 잠을 잘 잤는데 수면 측정기의 점수가 낮게 나와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사례도 있다"며 "수면 제품이 오히려 수면 강박을 만드는 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숙면의 핵심으로 '수면 위생'(Sleep Hygiene)을 강조했다. 수면 제품은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이기에 올바른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사공 원장은 "수면 장애 대부분은 과도한 불안과 긴장에서 기인한다"며 "같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는 것, 낮에 햇빛을 보는 것, 저녁 이후 스마트폰을 멀리 하는 등 자극을 줄이는 것, 자기 전 다음날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 것 등 삶을 여유롭게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