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천 강변에 자리한 약포 정탁 선생 기리는 서원
읍호정 오르면 강물·들판 한눈에…역사교육 공간 잠재력
예천군 호명읍 황지리에 있는 도정서원. <장석원기자>
경북 예천군 호명읍 황지리. 예천읍내와 경북도청신도시에서 차량으로 약 15분 남짓 달리면 내성천 물길이 완만하게 휘어 흐르는 강가 끝자락에 고즈넉한 기와지붕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화려한 관광지처럼 시선을 압도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처마 아래에는 조선 선비의 충절과 나라의 운명을 바꾼 한 장의 상소가 고요히 숨 쉬고 있다. 바로 약포 정탁 선생을 기리는 도정서원이다.
초여름의 내성천 강변길은 한적했다. 강변로를 따라 들어서면 들판과 마을, 낮은 산줄기 사이로 내성천이 흐르고, 그 강가에 도정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화려한 규모의 서원은 아니지만 오래된 한옥 특유의 단정한 분위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서원 마당에 들어서면 내성천과 강 건너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물길은 완만하게 굽어 흐르고, 건물들은 절제된 배치 속에 자리하고 있다. 처마와 기둥 곳곳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정서원 주차장에서 서원으로 가는 길 오른쪽에 읍호정이 있다. <장석원기자>
도정서원은 조선 중기 문신 약포 정탁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기록에 따르면 1640년 인조 18년에 사당이 처음 세워졌고, 1697년 숙종 23년에 강당채가 조성되면서 서원의 형태를 갖췄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훼철됐지만, 근래 들어 동재와 서재, 전사청, 누각 등이 복원되며 현재의 모습을 이어오고 있다.
서원 안쪽 약포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화려한 장식 대신 엄숙함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강당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 단순한 제향 공간을 넘어 학문을 강론하고 선비들이 뜻을 나누던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도정서원의 풍경을 완성하는 공간으로는 읍호정이 꼽힌다. 서원 앞 내성천 가까이에 자리한 정자에 오르면 강물과 들판, 마을과 산줄기가 한눈에 펼쳐진다. 정자 마루에 앉아 바라본 내성천은 유난히 느리고 고요했다. 강물 위로 부는 바람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도정서원은 옛 선비들의 수업공간인 서원 문루인 입덕루 강당의 모습. <장석원기자>
현장을 다녀간 지역 문화계 관계자들은 도정서원이 단순한 서원을 넘어 예천 정신문화의 상징적 공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조윤 예천문화원장은 "약포 정탁 선생은 단순히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 속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 선비"라며 "도정서원은 예천이 간직한 충절과 책임의 정신을 오늘까지 이어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정탁 선생의 삶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는 장면은 이순신 장군 구명 상소다. 정유재란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을 당시, 정탁은 목숨을 걸고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치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인재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재완 예천박물관장은 "당시 조정 분위기에서 이순신을 변호한다는 건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며 "정탁 선생은 권력보다 국가의 미래를 먼저 봤고, 그 판단이 결국 조선을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도정서원 앞 내성천 모습. <장석원기자>
서원 곳곳에는 이런 약포 선생의 정신이 배어 있었다. 오래된 기둥과 마루, 조용한 뜰과 강물 풍경은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울림을 남겼다. 이곳은 한 문중의 제향 공간인 동시에, 위기의 시대에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가를 묻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현재 도정서원은 약포 선생 종중이 관리하고 있으며, 한옥스테이 공간으로도 일부 활용되고 있다. 내성천 자연경관과 전통 한옥의 분위기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관광 자원으로서의 가능성도 높게 평가된다.
다만 현장을 찾은 일부 방문객들은 아쉬움도 전했다. 서원의 역사적 의미와 약포 정탁 선생의 생애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안내판이나 해설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함재봉 예천문화관광재단 이사는 "도정서원은 단순히 오래된 건축물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이순신, 조선 선비정신까지 함께 연결되는 역사 현장"이라며 "읍호정과 내성천 강변길, 예천의 유교문화 유산을 연계한 인문 탐방 코스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지역 교육계에서는 학생 역사교육 공간으로서의 활용 가능성도 주목하고 있다. 단순히 교과서 속 인물을 배우는 것을 넘어, 실제 공간에서 충절과 책임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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