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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나는 우리 동네 문화유산] 들판의 세 부처, 영주 불교조각의 길을 말하다

2026-06-13 14:59
사공정길 학예사가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기웅기자>

사공정길 학예사가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기웅기자>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들판 한가운데 작은 보호각이 서 있다. 벽이 없는 기와지붕 아래 바위에 새긴 세 부처가 모셔져 있다. 보물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사공정길 영주시 학예사는 이 불상을 두고 "크기는 크지 않지만, 신라 불교가 중앙에서 지방으로 퍼져가던 흐름을 보여주는 영주의 대표 불교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삼국시대 말기 또는 통일신라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보물로 지정됐고, 현재는 영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불상은 내성천에 가까운 미륵당들 북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보호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이 불상은 이름 그대로 바위에 새긴 삼존불이다. 가운데 본존불이 앉아 있고, 양쪽에는 협시보살이 서 있다. 본존불 높이는 약 130㎝, 양쪽 협시불은 각각 108㎝다. 원래는 바위 네 면에 모두 불상이 조각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며 대부분 닳았다. 지금은 삼존상 외에는 윤곽을 알아보기 어렵다.


세부 표현도 많이 마모됐다. 그러나 전체 구도는 비교적 뚜렷하다. 본존불은 둥근 두광을 두르고 있고, 두광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얼굴은 갸름하지만 볼에는 양감이 남아 있다. 머리는 소발이고,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온다. 손 모양은 한 손으로 두려움을 없애고, 다른 손으로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의 시무외여원인으로 보인다.


좌우 협시보살도 본존불과 비슷한 분위기다. 둥근 두광을 지니고, 머리에는 삼면 보관을 썼다. 얼굴은 갸름하고 어깨는 좁다. 몸의 굴곡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체구에 비해 얼굴이 크고, 옷자락은 묵직하게 표현됐다. 장식성은 강하지 않지만, 선은 굵고 양감이 있다.


사 학예사는 "이 불상은 세련된 궁정 양식이라기보다 지방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며 만든 소박한 신앙의 흔적에 가깝다. 마모가 심해 표정과 손끝은 흐릿하지만, 그 투박함 속에 당시 영주 지역 불교조각의 성격이 남아 있다"고 했다.


영주는 부석사와 소수서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불교조각의 밀도도 높은 지역이다. 영주동 석조여래입상, 석교리 석조여래입상, 북지리 석조여래입상,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 흑석사 석조여래좌상, 비로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등 보물급 불상들이 전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영주 영전사 석조여래입상, 영주 성혈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문화유산자료(영주 읍내리 석조여래좌상, 영풍 두월리 약사여래석불, 영풍 월호리 마애석불좌상, 영주 상망동 석불좌상, 백룡사 석조여래좌상, 흑석사 마애삼존불상, 영주 강동리 마애보살입상, 영주 휴천동마애여래좌상)로 지정된 불상까지 더하면 영주 전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석조 불교미술의 현장이다.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 <권기웅기자>

영주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 <권기웅기자>

사 학예사는 영주 지역 석조 불상의 특징으로 두꺼운 옷자락, 굵은 옷주름, 입체적인 세부 표현을 꼽았다. 단단한 화강암을 다루면서도 얼굴과 몸, 옷주름에 양감을 살린 점은 이 지역 석공들의 조각 기법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영주 지역 석조 불상들은 옷자락이 두껍고 옷주름이 굵직하며, 세부 표현이 전체적으로 입체적입니다. 영주 일대 석공들이 화강암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영주가 이런 불교조각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배경에는 지리적 조건도 있다. 영주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가까웠고, 죽령을 사이에 두고 북방 문화가 신라 왕경인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었다. 선진 불교문화와 지방의 토착 신앙, 교통로의 전략성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특히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은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나당전쟁이 끝나고 삼국통일이 이뤄진 뒤 죽령은 국가기간 교통망으로 중요성이 더 커졌다. 교통로 주변에 조성된 가흥동 마애불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성격도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사 학예사는 "영주에 많은 불상이 조성된 이유는 종교적 신앙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지역적 개방성, 전쟁으로 고통받은 백성을 위로하려는 뜻, 유민을 포용하려는 사회적 의미가 함께 담겼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도 이런 맥락 안에 있다. 이 불상은 인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과 양식적으로 비교된다. 민머리, 짧은 신체 비례, 부드러운 양감 등은 7~8세기 신라 불상 양식과 닿아 있다. 자료에서는 이 같은 형식이 통일신라 초기 영주 지역에서 특히 유행했던 것으로 본다.


문화재적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암리 마애여래삼존상은 이른 시기 사방불의 예로도 주목된다. 바위 네 면에 불상을 새겼던 흔적은 불교 신앙이 토착적인 바위 신앙과 결합한 사례로 해석된다. 불교가 사찰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마을과 들판, 자연 암석을 통해 지역민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작은 보호각 안의 세 부처는 화려하지 않다. 얼굴은 닳았고, 손끝은 흐릿하며, 옷주름도 세월 속에 무뎌졌다. 그러나 그 마모된 바위에는 신라 불교가 영주로 들어와 지역의 신앙과 만난 흔적이 남아 있다. 사공정길 학예사는 "유명 문화재만 볼 것이 아니라 생활권 가까이에 남은 불상들을 함께 살펴볼 때, 영주가 가진 역사 도시의 깊이가 더 분명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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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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