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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어머니라는 이름

2026-06-15 06:00
이형국 대구문인협회 시분과 부위원장

이형국 대구문인협회 시분과 부위원장

어머니라는 존재자, 잊을 수 있을까.


나에게는 평생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는 어린 시절이 있다. 불완전한 가정, 중학교로부터 대학 졸업 시까지 나도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로지 나만 쳐다보았다. 나에 대한 기대감이 늘 빗나가는데도.


아버지의 마지막 사업이었던 자동차 운전학원은 시작한 지 두 해가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 아버지는 빚쟁이를 피해 집을 떠나셨다. 당신의 우유부단한 성정 탓이었다.


갑자기 어머니는 과부 아닌 과부, 가장 아닌 가장이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수입원이 없어져 땟거리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생각 외로 어머니는 냉정하셨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생계 계획이 세워졌나 보았다. 다만 어머니의 변하지 않는 건 나를 향한 지독한 교육열이었다.


나의 중학교 입학금이 어찌 처리됐는지 어머니는 끝까지 말하지 않으셨다. 어머니의 평생 소원은 아들이 판사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겨우 언문 정도 익히던 시기에 우리 옆집엔 판사가 살고 있었단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아들이 판사가 되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아들의 학업성적은 날로 떨어져 갔다. 나는 천성적으로 강단이 부족했다. 그저 작심삼일, 일을 늘어놓되 끝맺음이 이뤄지지 않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모아 뒀던 약간의 돈으로 조그만 계를 만들었다. 수년이 지나고 신용도 생겨 제법 큰 돈의 계주가 되셨다. 계에서 얻어지는 차액이 생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아버지도 서울에 정착하여 우편환으로 가끔 돈을 보내오시곤 했다. 나도 중3 여름방학 때부터 초등학생 과외를 시작해서 생계에 보탰다.


나의 고교 시절은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공부해야 할 고3이 술을 마시다니. 교복 바지에 막걸리가 허옇게 말라붙은 채 집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문 앞에 바지가 개켜 있기에 '엄마가 어떻게 씻어 말렸지' 갸우뚱하며 입으려 하니 얼마나 닦아내었는지 곧 찢어질 듯했다. 지난밤 흔적 없애시며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을 치셨을까. 담배도 배웠다. 어머니께 발각될까봐 불안불안했지만, 그걸 모르셨겠는가. 술과 담배 등 절제 없는 생활이 재학 내내 이어졌다. 결국 폐결핵에 걸리고서야 방탕한 삶을 뉘우치게 되었다.


한동안 우리 집 생계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힘을 합해 꾸려나갔다. 내가 결혼하니, 어머니는 내 이름의 통장을 아내에게 넘겨주어 독립된 가계를 꾸려나가게 했다.


고마우신 어머니! 하늘나라, 그곳은 오늘도 꽃 피고 벌 나비 팔랑이는 따스하고 안락한 곳이겠죠.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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