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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우의 스토리 인문학]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

2026-07-09 16:54
여름은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술만 먹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욕하는 친구는 더욱 구체적으로 욕을 하고, 취했다 싶으면 잠이 드는 동생은 더 일찍 잠이 들고 늦게 깨어난다. <게티이미지뱅크>

여름은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술만 먹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욕하는 친구는 더욱 구체적으로 욕을 하고, 취했다 싶으면 잠이 드는 동생은 더 일찍 잠이 들고 늦게 깨어난다. <게티이미지뱅크>

주사(酒邪)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여름이 오는 시기에는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 주사가 섬세해지고 있다고. 술만 먹으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욕하는 친구는 더욱 구체적으로 욕을 하고, 취했다 싶으면 잠이 드는 동생은 더 일찍 잠이 들고 늦게 깨어난다. 술 냄새도 못 맡던 형은 이 계절에는 소주 한 병 정도는 마실 때도 있다. 취했다 싶으면 안경을 가게에 두고 가는 동생은 렌즈까지 자기 손으로 깨고는 한다. 이상한 계절이다. 덥고 습한 날씨가 반복되니 사람도 이상하게 변하는 듯하다. 누군가는 벌써 여름이 왔다고 하며 또 다른 이는 아직은 선선해서 괜찮다고 자기 위로를 하기도 한다.


나의 주사는 술자리에서 빠져나와 걷는다. 조용하게 자리를 떠나 걷는다. 놀이터나 벤치와 같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보이면 잠시 쉬기도 한다.


내가 자주 산책하던 길이 재개발 단지가 됐다. 아파트 창문 위에 칠해진 ○× 표시며, 쓸쓸하고 어둑해진 단지 내, 고요해진 그곳에는 나무만이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은행나무 아래에는 사과, 대추, 인삼이 소나무 아래에는 도라지와 같은 뿌리 식물이 잔뜩 있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낙과처럼. 잘 익은 술냄새가 났다. 이사를 앞두고 담금주를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모르는 원주민이 나무 밑에 부었으리라고 짐작한다. 한 집에서 나온 담금주였을까. 아니면 여러 집에서 만든 담금주가 여기로 모인 것일까.


술 냄새, 과일 냄새, 이상한 냄새가 났다. 나는 나무 주변을 두세 바퀴 돌았다. 정직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의식 같기도 했다. 누구를 위해 제를 지내는 모습처럼. 무언가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동그랗게 움직이는 일이 그러했다.


우리 집에도 담금주가 몇 있었다. 이모부가 만들어서 전해준 인삼주 같은 것이 있었다. 마시지는 못하고 어떻게 버렸던 기억이 있던 담금주다. 담그는 사람은 몇 봤지만, 끝까지 마셨다는 사람은 아직 본 적 없다.


살던 곳을 떠난 이들은 더 좋은 곳으로 갔을까. 이사가 힘들지는 않았을까. 담금주를 떠올리면 여러 사연이 생겨나는 것만 같다. 그것들이 모여 술을 더 진하게 하는 것일까. 더 슬프게 하는 것일까. 딱딱하게 상하고 있는 그때의 한 낙과처럼. 여러 방향으로 물들기를. 바라면서.


조온윤 시집 햇볕 쐬기. 시집에 수록된 중심 잡기의 화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창비 제공>

조온윤 시집 '햇볕 쐬기'. 시집에 수록된 '중심 잡기'의 화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창비 제공>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돌계단에 앉아 /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 근면하고 성실하기 /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 혹은 // 자기희생 /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 내가 믿는 신이 / 넘어지는 나를 붙잡아줄 것처럼 / 눈 감고 길 걸어보기 / 헛디디게 되더라도 / 누구의 탓이라고도 생각 않기…… // 그런데 / 새벽에 비가 왔었나요?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 나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 오랜 동면 끝에 지구로 돌아온 / 우주비행사처럼 묻는다 // 광적응이 덜 끝난 두 눈에 / 표정은 안 보이고 / 고개만 휘휘 젓는다 // 가끔씩 / 나는 나의 고도가 헷갈리고 // 사람들도 몰래 / 사람들의 발이 / 젖어 있곤 했다" (중심 잡기, 조온윤)


시의 화자는 착한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고 살아갈 만큼의 햇빛을 얻으려 한다. 다른 사람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모두가 축축한 발을 가지고 걷는다. 담담하게 언 땅 위에서 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그것들이 모여 어느새 나와 당신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되겠지만.


이 계절에는 섬세해지는 것이 많다. 이 계절을 대신하는 색깔이 있다. 파랑, 쨍한 주황, 모래색과 같은 것들. 그리고 또다시 술냄새가 가득했던 나무를 떠올린다. 이 나무 위에는 어떤 천사가 앉았을까. 오래오래 안부를 물어봤을까. 낙과를 살폈을까.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알록달록한 꿈을 꾸게 하는.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새로운 향수를 뿌리고, 꽃무늬 커튼을 떠올리는. 주사가 섬세해지는 계절이다. 신비로운 것이 많아지고. 세심해진 당신에게 가장 어여쁜 주사를 소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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