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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통장 발언대] 지명이 이상해…‘낫질’에 숨은 이야기...신리 ‘정호’ 리장과 함께한 낫질탐방

2026-07-26 10:22

신라 진흥왕 행차·월광태자 비단길 등 지명 유래 다양

팔만대장경 이운순례길·가얏고정원 등 역사 문화 유산 조명

미숭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석현철 기자>

미숭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석현철 기자>

여름비가 그친 뒤 미숭산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준다.


산등성이를 감싸던 구름은 천천히 능선을 타고 흘러내렸고, 숲에서 내려온 바람은 중화저수지 수면을 가볍게 흔들었다.


저수지 아래 가얏고정원에는 대가야의 음악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방문객을 맞고 있었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미숭산 자연휴양림의 짙은 숲이 한여름의 열기를 말없이 품어 안고 있었다.


처음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낫질'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낫질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흥미로운 설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신라 진흥왕이 대가야를 정벌한 후 이 일대에 '납시었다'고 하여 '나실'로 불리던 것이 '낫질'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구전으로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가 피난을 가던 길을 비단 나(羅) 자를 써서 비단길, 즉 '낫질'이라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오랜 세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패자의 설움과 역사의 발자취가 섞여 독특한 지명으로 굳어진 셈이다.


하지만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기자의 수첩에는 전혀 다른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낫질은 지명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미숭산 아래 저수지에서 만난 신리 정호 이장이  미숭산 정상을 바라보며 낫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석현철 기자>

미숭산 아래 저수지에서 만난 신리 정호 이장이 미숭산 정상을 바라보며 낫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석현철 기자>

신리마을 정호(62) 이장은 기자에게 뜻밖의 이야기부터 꺼냈다.


"낫질은 하나의 마을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낫질이라면 당연히 하나의 자연마을이나 옛 지명쯤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듣는 순간, 기자가 찾아온 이유가 지명의 유래가 아니라 그 이름을 지금까지 지켜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낫질은 중화1리와 중화2리, 신리, 내상리, 저전리 등 다섯 개 마을을 아우르는 오래된 생활공동체다. 행정구역은 각각 다르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스스럼없이 자신을 "낫질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정 이장은 "예전부터 우리는 어느 마을 사람이냐고 묻기보다 '낫질 사람'이라고 먼저 말했다"며 "행정구역은 나뉘어 있어도 생활은 늘 함께였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낫질이라는 이름은 주민들의 일상 곳곳에 살아 있다.


'낫질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지역 현안을 함께 논의하고, '낫질 대가야주부봉사회'는 마을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자연을 지키기 위한 '낫질 자연환경보존회'도 활발히 활동하며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령군민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낫질의 힘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평소에는 다섯 개 행정리로 나뉘어 생활하지만 운동장에서는 하나의 팀이 된다. 선수도, 응원단도, 주민들도 모두 같은 이름 아래 힘을 모은다.


정 이장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체육대회만 열리면 다섯 마을이 정말 한 가족이 됩니다. 누구는 응원하고, 누구는 음식을 준비하고, 누구는 선수로 뛰고…. 이길 때도 함께 기뻐하고 질 때도 함께 아쉬워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낫질이라는 이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도시에서는 행정구역이 곧 생활권이지만, 낫질에서는 조금 달랐다.


마을의 경계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온 시간이 더 오래됐고, 주소보다 '낫질 사람'이라는 이름이 먼저였다.


그래서 낫질은 오래된 지명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공동체였다.


미숭산 정상으로 향하는 임도,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의 인기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석현철 기자>

미숭산 정상으로 향하는 임도, 산악자전거 동호인들의 인기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는 곳이다. <석현철 기자>

낫질 마을을 아우르는 미숭산은 과거를 품은 산이었다


정 이장의 안내를 받아 미숭산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을 향하는 길가에는 은행나무와 자작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미숭산 정상을 가르키는 안내판 <석현철 기자>

미숭산 정상을 가르키는 안내판 <석현철 기자>

굽이굽이 이어진 임도를 따라 오르자 어느새 고령군과 합천군의 경계에 닿았다. 이곳에서부터 미숭산 정상까지는 약 1㎞. 차량은 더 이상 오를 수 없어 마지막 구간은 숲길을 걸어야 한다.


정호 이장은 차에서 내려 정상 쪽을 가리켰다.


"예전에는 학교 소풍도 대부분 이곳으로 왔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넓은 평지와 샘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도시락을 먹고 뛰어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수풀이 많이 우거져 예전처럼 쉽게 오르기는 어렵습니다."


미숭산 정상 일대는 고려 말 충신 이미숭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역사 현장이지만 지금은 울창한 숲속에 조용히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미숭산이 고령을 대표하는 산임에도 정상부는 행정구역상 합천군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산은 하나지만 행정의 경계는 둘로 나뉜 셈이다.


이 때문에 고령군이 미숭산의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활용한 관광자원 개발을 추진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따른다.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지만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사업은 인접 지자체와의 협의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정 이장은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행정구역만 다를 뿐"이라며 "미숭산은 고령과 합천이 함께 품고 있는 산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미숭산이 품은 역사적 가치를 현실의 관광 자원으로 꽃피우기 위해서는 행정구역의 벽을 넘는 지혜가 필요하다.


실제로 고령군은 성주군, 경남 합천군과 손잡고 총 49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팔만대장경 이운순례길'을 조성한 바 있다.


강화도를 떠나 낙동강 개경포를 거쳐 해인사로 이어지는 41km 구간 중 고령의 미숭산 자락은 이운의 핵심 경로다. 지자체 간 연계 협력 사업으로 탄생한 이 길은, 산과 역사는 행정 경계로 나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미숭산 역시 자연휴양림과 자작나무 숲, 앞으로 조성될 숲치유센터, 그리고 이미숭 장군과 월광태자의 역사 이야기까지 다양한 자원을 품고 있다. 행정구역이라는 경계를 넘어 역사와 자연을 함께 연결하는 관광 콘텐츠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숭산 아래 자리잡은 저수지는 물이 깨끗해 미숭산 아래 5개마을(낫질) 주민들이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석현철 기자>

미숭산 아래 자리잡은 저수지는 물이 깨끗해 미숭산 아래 5개마을(낫질) 주민들이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석현철 기자>

산은 행정구역을 구분하지 않는다.


수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이 산을 넘나들었고, 오늘날에도 미숭산은 고령과 합천을 함께 품으며 같은 숲과 같은 물을 내어주고 있다.


그렇게 미숭산이 내려준 물은 다시 낫질 다섯 마을의 논으로 흘러들어 주민들의 삶을 이어간다.


산이 내려준 물은 공동체를 키웠다


미숭산 자락 아래 자리한 저수지는 낫질 사람들에게 단순한 농업용수가 아니다. 산이 오랜 세월 품어낸 생명의 물줄기이자 다섯 마을을 하나로 이어준 삶의 근원이기도 하다.


맑은 물은 중화1리와 중화2리, 신리, 내상리, 저전리의 논으로 흘러들고, 주민들은 지금도 이 물을 이용해 우렁이농법을 중심으로 친환경 벼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정호 이장은 "좋은 산이 있으니 좋은 물이 나오고, 좋은 물이 있으니 좋은 쌀도 나는 것"이라며 "미숭산은 우리에게 풍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말했다.


미숭산 자락 아래에는 맑은 물을 가득 담은 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바람이 스치고,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천천히 낫질 다섯 마을의 논으로 향한다.


정호 이장은 저수지를 가리키며 "이 물이 없으면 낫질도 없었다"고 말했다.


"예전부터 이 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미숭산이 좋은 물을 내어주니 논도 살아나고, 사람도 살아온 겁니다."


실제로 중화1리와 중화2리, 신리, 내상리, 저전리 주민들은 지금도 이 물을 이용해 친환경 우렁이농법으로 벼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농약과 제초제 사용을 줄인 건강한 농업은 깨끗한 수질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일이다.


산이 품은 물은 논을 적시고, 논은 다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한다.


수백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이 물길은 단순한 농업용수가 아니라 낫질 공동체를 이어온 생명의 젖줄이었다.


정 이장은 "미숭산은 우리에게 풍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며 "좋은 산이 있으니 좋은 물이 나오고, 좋은 물이 있으니 좋은 쌀도 나는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팔만대장경 제작과정 안내표지판 <석현철 기자>

팔만대장경 제작과정 안내표지판 <석현철 기자>

역사는 길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졌다


낫질을 이야기하면서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를 빼놓을 수 없다.


지역에는 서기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한 뒤 마지막 왕자인 월광태자가 미숭산 자락을 넘어 합천 방면으로 몸을 피했다는 이야기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다.


역사적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주민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귀에 익은 마을 이야기이자 대가야의 마지막 흔적이다.


정호 이장은 "어릴 적 어른들께서 월광태자가 이 길을 넘어갔다고 자주 말씀하셨다"며 "맞고 틀리고를 떠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다 보니 이 산과 길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미숭산에는 월광태자뿐 아니라 고려 말 충신 이미숭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는 이야기,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질 때 지나갔다는 이운순례길의 흔적까지 켜켜이 쌓여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길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를 잃은 왕자의 발걸음도, 국난을 극복하려는 염원을 품은 대장경판의 행렬도 모두 이 산길을 지나갔다는 기억은 오늘날까지 주민들의 삶 속에서 전설이자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낫질 사람들에게 길은 단순히 오가는 통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살아 있는 역사 그 자체다.


미숭산 자락을 따라 걷다 보면 숲길 한편에 '팔만대장경 이운순례길' 안내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길가에는 팔만대장경의 제작 과정과 이운 과정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판이 설치돼 있어, 잠시 걸음을 멈추면 700여 년 전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정 이장은 "어릴 적에는 그냥 산길인 줄만 알았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이 길이 얼마나 귀한 역사였는지 새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다.


고려 말 국난 속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은 이후 조선 태조 때 강화도를 떠나 한양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졌다. 당시 대장경판은 낙동강 물길을 따라 고령 개경포에 도착한 뒤, 육로를 이용해 미숭산 자락을 넘어 합천 해인사까지 이운된 것으로 전해진다.


낫질을 지나는 이 길은 바로 그 여정의 한 구간이다.


수백 년 전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대장경판을 옮기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나갔던 길을 오늘날에는 누구나 걸어볼 수 있는 셈이다.


정 이장은 "이 길은 단순히 옛길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자랑"이라며 "관광객들이 풍경만 보고 가기보다 이 길에 담긴 역사도 함께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숭산 숲길은 지금도 조용하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면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산을 넘던 옛사람들의 숨결이 들려오는 듯하다.


길은 단순히 목적지를 향해 걷는 공간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문화와 신앙, 그리고 사람들의 염원을 품고 오늘까지 이어져 온 살아 있는 역사였다.


미숭산 자연휴양림 정상에서 바라본 전경 <석현철 기자>

미숭산 자연휴양림 정상에서 바라본 전경 <석현철 기자>

미숭산 자연휴양림 종합안내판 <석현철 기자>

미숭산 자연휴양림 종합안내판 <석현철 기자>

숲은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상을 지나 내려오는 길목에 미숭산 자연휴양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울창한 숲길과 자작나무 군락은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내고, 숲 사이로 이어지는 산책길은 도심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여유를 선사한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 방문객과 캠핑객들의 발길도 이어진다.


이곳에는 앞으로 숲치유센터도 들어설 예정이다.


역사와 문화, 자연을 품은 미숭산이 이제는 휴양과 치유까지 아우르는 산림복지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정 이장은 "낫질은 옛이야기만 간직한 마을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변하고 성장하는 곳"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숲도 걷고, 역사도 배우고,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숭산은 과거를 기억하는 산이면서도, 동시에 미래를 준비하는 산이었다.


오래된 이름은 사람을 잊지 않았다


낫질 마을에 위치한 가얏고 정원 <석현철 기자>

낫질 마을에 위치한 가얏고 정원 <석현철 기자>

미숭산 자락 아래 자리한 가얏고정원은 낫질의 또 다른 시간을 품고 있었다.


낫질에서는 우륵이 남긴 가야금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을 곳곳에는 대가야의 음악세계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체험관에서는 가야금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연주법까지 직접 보고 배우며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전시실에 머무는 문화유산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으며 몸으로 느끼는 살아 있는 대가야 문화인 셈이다.


정 이장은 "아이들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처음 접하고 직접 연주해 보는 모습을 보면 참 뿌듯하다"며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배우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가얏고정원을 둘러본 뒤 저수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잔잔한 수면 위를 가로지르는 데크길과 정자는 미숭산의 숲과 저수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있었다.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는 사람들, 데크를 따라 천천히 산책하는 가족들의 모습에서는 여유가 묻어났다.


과거의 유산은 더 이상 박물관 안에 머물지 않았다.


역사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와 쉼이 되었고, 문화는 체험이 되었으며, 자연은 삶을 치유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수지 위를 가로지르는 데크와 정자는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또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과거의 유산은 박물관 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있었다.


숲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리 정호 이장이 낫질이라 불리우는 5개리 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석현철 기자>

신리 정호 이장이 낫질이라 불리우는 5개리 마을을 설명하고 있다. <석현철 기자>

취재를 마치고 다시 낫질을 내려다봤다.


정 이장의 손끝이 향한 곳에는 중화1리와 중화2리, 신리, 내상리, 저전리의 들녘이 한눈에 펼쳐져 있었다.


그 들녘에는 대가야 마지막 왕자 월광태자의 전설이 흐르고, 고려 말 충신 이미숭 장군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지던 숭고한 길도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자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역사유적도, 아름다운 풍경도 아니었다.


지금도 서로를 "낫질 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었다.


행정구역은 다섯 개 마을로 나뉘어 있지만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나의 낫질이 살아 있었다. 함께 농사를 짓고, 함께 물을 나누고, 함께 웃고, 함께 체육대회를 준비하며 공동체의 이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기자는 낫질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아 이곳을 찾았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 얻은 답은 예상과 달랐다.


낫질은 오래된 지명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온 공동체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지금도 미숭산 아래에서, 다섯 개 마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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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철

지역의 변화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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