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터줏대감 5개 업체 협동조합 결성
공동 장비로 디지털 전환…매출 3년 새 두 배
조합 밖 골목 여전히 침체, 골목 전체 회복 숙제로
모바일과 전자문서 확산으로 쇠퇴해온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 골목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30년 이상 골목을 지켜온 5개 인쇄업체가 꾸린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이 기나긴 상권 침체에서 벗어날 새로운 돌파구로 떠오르면서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최첨단 공동 장비 설치 및 생산체계 구축으로 매출 증대는 물론, 정부 표창까지 받았다는 점에선 분명 의미 있는 성과로 치부된다.
◆5개 업체 힘 모아 일군 디지털 전환…매출·수상 성과로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의 5개 업체가 모여 만든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의 작업 공간. 고가의 출력·제본 장비를 공동으로 구매해 사용하고 있다. 조윤화 기자
26일 대구 중구청 등에 따르면,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은 남산동 인쇄 골목 내 5개 업체(30년 이상 종사)가 2021년부터 결성해 운영 중인 상권 협력체다.
이 조합의 결성 계기는 인쇄 골목의 급격한 쇠퇴와 궤를 같이한다. 남문시장에서 계산오거리까지 500m 남짓 이어지는 남산동 인쇄골목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2천여개 인쇄 관련 업체가 밀집해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최대 규모의 인쇄단지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모바일 기기 보급으로 종이 인쇄물 수요가 줄고 주요 고객이던 관공서마저 전자문서 사용을 확대하면서 일감이 급감했다. 현재 골목에 남아 있는 인쇄 관련 업체는 100여 곳에 불과하다.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의 5개 업체가 모여 만든 디지털인쇄협동조합에서 공동 구매한 '고해상도 디지털 윤전인쇄기'. 분당 A4 단면 2천 매를 인쇄할 수 있으며, 장비 가격만 17억 원에 달한다. 조윤화 기자
이에 개별 업체가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디지털 전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부 상인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이란 협력체가 결성되게 됐다. 디지털시대에 맞춰 공동 장비를 구축해 함께 이용하는 방식으로 투자 부담을 낮추고 생산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다. 당시 이들은 조합 구성에 맞춰 고성능 인쇄 기계 10대를 공동으로 마련했다. 기계값만 도합 40억원에 달한다. 당시 중소벤처기업부의 소상공인 협업 활성화 공모사업에 선정돼 장비 구입비 일부를 지원받은 것도 힘이 됐다.
협업 성과는 매출로 나타나고 있다. 조합의 외주 작업 매출은 2022년 6억3천만원에서 2023년 9억5천만원, 2024년 12억원, 지난해 15억3천만원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도 현재까지 12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쇠퇴하는 인쇄업계에서 소상공인들이 협업으로 이뤄낸 이례적인 성과는 대외적으로도 인정받았다.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은 지난해 '소상공인협동조합 비즈니스모델 경진대회'에서 장관상을 받은 데 이어, 지난 2일에는 협동조합 가치 확산과 지속 가능한 경영에 기여한 공로로 기획예산처장관 표창을 받았다.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의 5개 업체가 모여 만든 디지털인쇄협동조합의 윤지현 이사장이 인쇄 작업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 조윤화 기자
디지털인쇄협동조합 윤지현 이사장은 "인쇄업체 한 곳이 제판, 출력, 제본을 모두 맡는 경우는 드물어 외주를 거치면 작업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조합은 한 건물 안에서 전 공정을 처리할 수 있게 해 제작 기간과 비용을 줄였다"며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던 물량을 지역에서 생산할 기반을 마련하고 숙련된 고령 기술자를 재고용하는 등 남산동 인쇄골목을 지키려는 노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이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골목 전체 회복은 여전히 '숙제'
조합의 성과를 골목 전체로 확산하고, 인쇄 골목의 명맥을 잇기 위한 민·관·학 차원의 현실적 대안도 여럿 제시됐다.
윤지현 이사장은 남산동 인쇄골목을 탈바꿈할 재개발 사업을 통해 낙후된 골목을 개선하고, 인쇄골목을 역사와 기술이 축적된 소중한 자산으로 이끌어낼 보존 사업까지 동반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그는 "서울 을지로·충무로 인쇄골목은 그들만의 역사 스토리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동 장비와 작업공간, 연구개발, 시제품 제작, 온라인 판로 지원 등 인쇄업체 집적시설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며 "남산동에서는 현재 조합이 자체적으로 공동 장비와 작업공간을 구축했지만, 이를 골목 전체로 확산하기에는 민간의 힘만으로 한계가 있다. 관련 기관·단체가 힘을 합쳐 재개발 사업과 보존 사업을 동시에 추진해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이뤄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 중구 남산동 인쇄골목 풍경. 영남일보db
중구청은 행정에서 힘을 보탤 현실가능한 사업 과제로 공영주차장 조성과 거리 정비 등을 꼽았다. 남산동 인쇄골목이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강점으로 가졌음에도, 산업구조 변화 속 주차공간과 편의시설, 문화·여가시설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중구청 경제과 측은 "구비만으로 특정 골목을 지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상인들의 참여 여건을 살피면서 활용 가능한 제도와 공모사업을 안내해 인프라 개선을 단계적으로 이뤄낼 것"이라며 "중소벤처기업부나 대구시의 상권 활성화 공모사업에 참여하려면 정식 상인회나 골목상권 공동체 등록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선 상인들을 결집하는 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학계에선 단순한 지원책보다 업계의 고령화와 후계 인력 부족 등을 고려한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계명대 신재용 교수(도시계획학과)는 "인쇄 장비 등 인프라가 개선되더라도 기존 인쇄업 종사자들이 디지털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거나 후계자가 없다면 활용도와 지속 가능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경쟁력을 갖춘 업체에 디지털 전환과 인력 양성, 판로 확대를 지원하는 한편, 남산동 인쇄골목 장인들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지속 살펴봐야 한다.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에서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는가'가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윤화
사회1팀 조윤화 입니다. 중구 동구 시민단체 복지 맡고 있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