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오후 2시 서문시장의 한 점포에서 방문객들이 '말랑이'를 손으로 주무르며 제품을 비교하고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지난 4일 오후 2시 대구 서문시장의 한 점포. 평일 낮 시간인데도 장난감을 올려놓은 매대 앞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형형색색의 촉감 완구가 매대를 가득 채우고, 10대 여학생들과 20대 청년들이 이를 손으로 주무르며 제품을 비교하고 있었다. 가게 한켠에는 볼펜과 이에 끼워 꾸밀 수 있는 다양한 파츠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이서윤(17) 양은 "요즘 SNS에서 유행하는 장난감 '말랑이'에 푹 빠졌다"며 "여기가 '말랑이 성지'라 들었다. 직접 만져보고 구매하기 위해 찾았다"고 웃었다.
SNS발 유행 장난감 '말랑이'. 실리콘·고무 등의 소재로 제작돼 손으로 주무르며 촉감을 즐길 수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SNS발 장난감 열풍으로 전통시장이 활기를 찾고 있다. 과거 식재료와 의류가 중심이었던 시장에 이색 문구류를 취급하는 점포가 늘며 젊은 소비층의 발길이 이어진다. 대구 서문시장과 칠성시장 역시 온라인상에서 '말랑이 성지' '키캡 성지'로 입소문을 타며 관련 점포들이 평일에도 인산인해를 이룬다.
최근 SNS에서는 촉감, 소리 등 감각적 요소를 강조한 장난감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실리콘·고무 등의 소재로 제작돼 손으로 주무르며 촉감을 즐길 수 있는 '말랑이', 왁스로 코팅된 겉면을 누르면 안에 든 내용물이 바삭하게 깨지는 '왁뿌볼', 누르면 경쾌한 타건음을 내는 작은 키보드 형태의 '키캡' 등이 대표적이다.
인스타그램에 '왁뿌볼'을 검색하면 나오는 관련 콘텐츠. 많게는 수백만 대의 조회수를 기록한다. <인스타그램 캡처>
◆SNS발 장난감 인기에 시장에 새 소비층 유입
이 같은 장난감들은 특히 성인들 사이에서 인기다. 어린 시절 즐기던 장난감이나 캐릭터 상품을 성인이 된 뒤에도 소비하는 '키덜트(Kidult) 문화'가 주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다. 직장인 등 구매력을 갖춘 이들이 지갑을 열며 실제 판매 증가세도 가파르다. 온라인 플랫폼 '지그재그'에 따르면 지난 6월 '왁뿌볼' 검색량은 1월 대비 약 64배(6239%) 폭증했다. 같은 기간 '말랑이' 검색량 역시 약 9배(809%), 거래액도 약 13배(1267%) 늘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명예교수의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6'이 제시한 올해 소비 트렌드 '필코노미'와도 맞닿아 있다. 고물가 속에서도 적은 비용으로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는 소비가 문구점까지 확산된 것이다. 이들 제품은 3천원~1만원대의 부담 없는 가격에 즉각적인 만족을 느낄 수 있어 '가성비 힐링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직장인 김지영(28)씨는 "어릴 때 문방구에서 사서 갖고 놀던 '액체괴물'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랑이를 손으로 주무르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라며 "가격 부담도 크지 않아 기분 전환을 위해 하나씩 사게 된다"고 말했다.
볼펜과 볼펜 꾸미기용 파츠. 나만의 커스터마이징 볼펜을 만들 수 있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SNS를 통해 장난감 콘텐츠가 인기를 끌면서 오프라인에서도 이들 제품을 앞다퉈 판매하고 있다. 특히 시장 상권에서 이를 취급하는 점포가 늘며 전통시장에 새로운 소비층이 유입되고 있다. 대구 서문시장 아진상가와 칠성시장 완구거리 일대는 이들 점포가 모여 있어 이른바 '성지'로 통한다. 처음엔 10대 학생들이 주로 찾다 이제는 2030 청년들도 방문한다.
서문시장에서 도소매점을 운영하는 임성진 재경사 대표는 지난 2월부터 커스터마이징 볼펜·키캡, 세 달 전부터는 말랑이도 취급하고 있다. 임 대표는 "이전엔 온라인에서만 판매하다 인기가 좋아 오프라인에서도 판매하기 시작했다"면서 "손님이 많은 날엔 오전부터 영업이 끝날 때까지 가게가 쉴 새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찬다"고 말했다. 또 "젊은 사람들이 시장에 오는 일이 많지 않은데 최근에는 청소년부터 20대까지 다양하게 찾으며 커플 단위도 많다"며 "시장이 전보다 활성화된 느낌"이라고 했다.
시장 내 다른 잡화점 대표 A씨도 "볼펜 꾸미기에 이어 키캡, 최근에는 말랑이까지 연쇄적으로 유행하면서 젊은 사람들이 꾸준히 오고 있다"며 "이들이 시장을 찾으면서 주변 식당도 최근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서문시장 내 한 잡화점에서 판매 중인 '키캡'. 작은 형태의 작은 키보드형 장난감이다. 조현희기자 hyunhee@yeongnam.com
◆반짝 유행에 그칠라…업계, 열풍 지속 여부에 촉각
문구업계도 SNS발 장난감 열풍을 당장은 반기는 분위기다. '말랑이' '키캡' 등이 학용품 판매에 의존했던 업계의 새로운 매출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구점의 인기 역시 이례적이다. 업계는 이커머스와 다이소의 가세, 학령인구 감소 및 학습 준비물 무상지원 제도 등으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다. 특히 팬데믹 당시에는 직격탄을 맞아 줄줄이 폐업했지만, 최근에는 대조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다만 이런 열풍이 '반짝 열풍'으로 끝난다면 다시 소비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4일 국세청 국세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 6월 전국 문구점 수는 9천854곳으로 5년 전 팬데믹 시기(9천212곳)와 비교하면 6.9%(642곳) 증가했다. 같은 기간 대구의 문구점도 397곳으로 9.9%(36곳) 늘었지만, 지난해 동월(407곳)에 비하면 줄었다. 문구·완구류는 유행 주기가 짧은 품목이기에 감소세가 언제든 가속될 수 있어 걱정이 크다.
대구 칠성종합시장 완구골목 한 상가에 '폐업!! 점포정리 땡처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영남일보 DB>
문구업계는 이런 위기로 2022년 문구 소매업을 '소상공인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지정해달라고 동반성장위원회에 촉구한 바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동반위 주도로 대형마트와 상생협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탓에 실효성은 높지 않다.
발길이 지속해 이어질 수 있도록 업계는 카테고리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빠르게 바뀌는 유행에 영세 자영업자들이 제때 대응하기는 어렵다. A씨는 "유행하는 제품이 워낙 빨리 바뀌다 보니 새로운 상품을 계속 들여놓는 것도 쉽지 않다"며 "지금 잘 팔리는 제품이 언제까지 인기를 끌지 알 수 없어 재고 부담도 있다"고 말했다.
대구 북구 침산동의 한 무인문구점. 지난 6월 대구의 문구점 수는 397곳으로 집계됐다. <영남일보 DB>
다만 이 같은 걱정에도 전문가들은 SNS발 장난감 열풍이 당분간은 이어질 것이라 전망했다. 젊은 세대의 심리적 결핍과 소비 트렌드 변화가 맞물린 현상인 만큼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이은희 인하대 명예교수(소비자학과)는 "청년들이 어릴 적 즐기던 장난감을 갖고 노는 현상은 어른으로서 감당해야 할 무거운 책임감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라며 "젊은 세대가 현실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지속되는 한 정서적 안정을 위해 추억을 적극 소비하는 흐름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현희
문화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