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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 이사벨라 버드 비숍과 함께한 지난 여름

2026-08-13 06:00
송종규 시인

송종규 시인

19세기 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여름은 치열하고 뜨거웠다.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누릴 수 없는, 자연의 일부로 거기 존재하면서, 모든 악조건을 견뎌야 하는 인간의 한계를 비숍은 고스란히 경험했고 치밀하고 친근하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작가이자 지리학자인 이 서양의 여인 비숍은 1년 가까이 조선에 체류하면서 최상류층인 왕실에서부터 빈민층까지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증언하였고 체험과 고증을 통해서 성실하게 기록했다. 그녀는 자신의 드레스를 들추기도 하는 호기심 많은 조선의 여인들을 남루하고 더러웠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의 생활 수준, 그리고 문명과 교육 수준까지, 비숍의 문장을 통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낙후된 환경을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19세기라는 낯선 시대를 21세기의 우리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선조들이 살아온 어둡고 정체된 조국을, 그 낙후된 시간을, 우리는 비숍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거나 한편으로는 아득하게 그리워할 수 있을 뿐이다.


유난히 더웠던 이번 여름 나는 몇 번, 이 서양의 여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기장 속에 다닥다닥 붙어서 밤을 새우던 어릴 적 외갓집의 여름밤을 떠올리기도 했다. 짧은 여름밤의 초롱초롱하던 그 별빛은 뜨겁고 그리운 시간 속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반짝인다. 에어컨도 TV도 없던 시절이지만 사람들은 냉혹한 자연의 모든 조건을 당연하게 몸으로 받아냈다. 불편했지만 낭만과 꿈으로 가득했던 그 여름의 기억은 강렬하고 신비하게 추억의 아랫목에 남아 있다. 그 아랫목에서는 흑백필름 속 같은 두런두런 정겨운 사투리도 들려온다. 내가 이 여름 불쑥 서양 문물에 익숙해 있던 비숍 여사를 떠올리는 것은, 그 시절 동서양 문명의 격차와, '남루하고 더러운' 조선의 여인들이라고까지 언급했던, 그러나 진중하고 정확하며 지적이던 비숍이 문명의 불모지인 조선에서 겪었을 여물 냄새 나는 여름을 어떻게 견뎠을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땅의 곳곳을 탐사했는지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여행 중 겪은 하나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어느 날 비숍이 시골길을 걷고 있었을 때, 소를 몰고 가는 한 농부가 무거운 짐을 자신의 지게에 지고 가는 것을 보고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왜 짐을 소의 등에 싣지 않으시지요? 소에게 실으면 훨씬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다. "이 소도 오늘 하루 종일 나와 함께 고생했는데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의 짐을 내가 좀 덜어주고 싶어서이지요." 당연히 이 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의 정신이라고 그녀는 기록했다. 열악하고 빈곤한 환경 속에서도 선조들의 철학과 사상의 품격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후대인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일 것이다.


올해 여름을 역대급 더운 여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이 뜨거운 여름날의 불운을 숨기려 하지 않고 약간은 과장하기도 한다. 당연히 우리는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19세기로 돌아갈 수 없고 19세기적인 탈문명적 환경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만 전진할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세상은 변하고 있고 지구환경이나 우주의 질서마저 안전지대가 아닌 곳에 살고 있다. 비숍의 도전과 탐구 정신은, 철저한 고증과 체험으로 남긴 소중한 그 증언들은, 그 시대를 반영한 역사서이기도 하지만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정직한 삶의 부분들을 기록한 한 시대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을 보이고 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어스름. 나는 왜 서양의 여인 비숍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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