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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에어컨 바람보다 서늘한 폭포수가 사는 피서지

2026-08-14 06:28
이경윤, 관폭도, 종이에 엷은 색, 27.9×19.4㎝,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경윤, '관폭도', 종이에 엷은 색, 27.9×19.4㎝,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푸른 옥빛 바다가 리듬을 타며 출렁인다. 마음도 덩달아 춤을 춘다. 고래불 해수욕장이다. 전망 좋은 커피숍에서 바다를 굽어본다. 다시 해안도로를 달려 첩첩이 깊은 산으로 접어든다. 짙은 녹색의 세계가 펼쳐지는 칠보산이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우렁차다. 폭포수다. 차가운 물살에 발을 담근다. 조선시대 '폭포그림' 속의 신선이 된 듯, 피서에 빠져든다.


◆낙파 이경윤이 선사하는 경건한 '관폭도'


모두가 떠나는 피서의 계절이다.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인파로 피서지마다 북적인다. 이와 달리 조선시대 선비들의 피서는 고요했다. 책이나 거문고를 들고 핫플레이스로 가기보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폭포를 감상하는 관폭(觀瀑), 계곡에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 물을 보며 더위를 즐기는 관수(觀水)로 여름을 났다. 유유자적 폭포를 완상하는 풍류적인 삶을 누리는가 하면, 은둔자적인 자세로 세상의 이치를 깨치고자 했다. 피서는 수양의 시간이었다.


깊은 산속에서 하염없이 폭포수를 바라보는 신선을 그린 그림이 관폭도(觀瀑圖)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절파 화가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관폭도'는 선비가 시동을 데리고 폭포를 감상하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그는 흑백대비가 선명한 한편의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절파 화풍을 구사한 고사인물화를 많이 그렸다.


잔잔하게 흐르는 공기를 가르고 폭포는 하늘에서 두 줄기 빛으로 쏟아진다. 아련하게 처리된 산을 배경으로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신선의 세계로 인도한다. 깊은 울림을 주는 공간만큼 가르침도 크다. 물아의 경지에 든 선비는 두 손 모아 다소곳하게 폭포와 마주한다. 수련의 시간이다.


세찬 물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강한 먹으로 바위의 질감을 거칠게 살렸고, 뾰족한 잎의 나무를 그려서 인물을 받쳐주었다. 긴 도포자락의 선비는 물줄기 너머 세상을 바라본다. 시동은 폭포 소리에 질린 듯 선비 뒤에 숨어서 고개를 돌렸다. 단출하지만 경건한 느낌이 감돈다. 선비는 세상사에서 현명한 대처법을 궁구하는 중이다.


정선, 박연폭포, 비단에 수묵담채, 119.5×52.2㎝, 1750년경, 개인 소장

정선, '박연폭포', 비단에 수묵담채, 119.5×52.2㎝, 1750년경, 개인 소장

겸재 정선이 감동으로 빚은 '박연폭포'


조선 후기가 되면 명승지를 찾아서 피서를 즐겼다. 화가가 직접 유명한 곳에서 스케치하고 자신의 감정을 시로 적은 기행사경을 남겼다. 은유적이었던 '관폭'은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주제로 변했고, 실제 폭포를 감상하며 풍경에 감동한 자신을 시와 그림에 투영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우리나라 3대 폭포인 설악산 대승폭포와 개성 박연폭포, 금강산 구룡폭포를 여행하며 그림을 남겼는데, 그중 '박연폭포(朴淵瀑布)'가 빼어났다. 말년의 노련한 필치와 감성으로 표현한 '박연폭포'는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장관이다. 실제 물줄기보다 길게 그려 폭포의 기상을 극대화했다.


'중경지(中京誌)'에, "박연(朴淵)은 형상이 돌항아리와 같은데 들여다보면 시꺼멓다. 너럭바위가 중심에서 솟구쳐 올라온 것이 있으니 도암(島巖)이라 한다. 물이 절벽 아래로 30길이나 떨어지는데 완연히 흰 무지개가 허공에 비치는 듯하고 날리는 눈이 벽에 뿌려내는 듯하며 우레가 날고 번개가 치는 듯하여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라고 하였다.


겹겹이 중첩된 바위가 철벽으로 둘러싸였다. 어느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곳에 물길만 낙하한다. 오른쪽에는 검은 바위를 묵직하게 그려서 독수리가 비스듬히 날개를 접고 폭포를 바라보는 형상이다. 왼쪽 바위는 공간을 작게 배치하여 변화를 주었다. 검은색 바위 주변에 나무를 두어 화면을 발랄하게 만들었다. 폭포수는 바위의 호위를 받으며 장쾌하게 쏟아진다.


아래쪽에는 유람객의 폭포 감상을 돕는 범사정(泛槎亭)이 있다. 두 팀이 박연폭포를 보기 위해 도착했다. 한 팀은 갓을 쓴 선비 두 명이 시동을 데리고 폭포의 절경에 감탄하고, 다른 팀은 나이 지긋한 선비가 지팡이를 짚은 채 시동과 함께 물소리에 빠져든다. 모두 박진감 넘치는 폭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김홍도, 구룡연, 종이에 엷은 색, 29.4×43.3㎝,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 '구룡연', 종이에 엷은 색, 29.4×43.3㎝,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가 포착한 비경 '구룡연'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기행화첩을 엮으면서 금강산을 대표하는 구룡폭포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그중에 장대한 물줄기를 묘사한 '구룡연(九龍淵)'과 주위의 절경을 사실적으로 포착한 '구룡연'이 있다.


구룡폭포는 금강산에서 가장 큰 규모여서, 물길이 무려 50m에 달한다. 거대한 물줄기가 수직으로 쏟아져 밑바닥 판석에 깊이 10여 m나 되는 웅덩이가 생겼다. 여기에 유점사(楡岾寺) 53부처에게 쫓겨난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 하여 구룡연이라고 한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구룡폭포를 보고, "귀는 터진 채로 먹어버리고, 눈은 뜬 채로 멀어버리고, 얼은 말짱한 채로 빠져버리고, 어느 틈엔지 폭포가 나에게 와서 들씌워지고, 나는 그만 폭포 속으로 쑥 들어가버립니다"라고 했다.


'구룡연'은 중첩된 산봉우리를 솟아오르게 그려서 금강산의 장엄함을 짐작케 한다. 오른쪽 멀리 암벽과 상류에 살짝 보이는 뒷산까지 그려 변화를 주었다. 바위는 날카로운 붓질로 켜켜이 쌓아 단단한 질감을 자아낸다. 검고 강인한 바위 사이로 흘러내린 물길이 깊은 웅덩이 속으로 내리친다. 폭포 소리에 귀가 멎는다.


김홍도는 구룡연을 보고 제사를 달았다. "절벽에 올라서면 미끄러지는 발을 걱정하고, 골 안에 들어서면 무서워 달아나려는 마음을 쫓아버리니, 항상 못 속의 아홉 용이 사람을 못났다고 웃을까 걱정이다."


윤덕희, 관폭도, 연옹화첩 수록

윤덕희, '관폭도', 연옹화첩 수록

낙서 윤덕희의 모두를 위한 '관폭도'


지금까지 폭포수가 주인공이었다면, 화가들은 여기에 변화를 가미했다. 상류에서 잔잔하게 흘러온 물길이 절벽에서 여러 줄기로 떨어져 계곡으로 흘러드는 새로운 경향을 시도하는가 하면, 인물 옆에 거문고를 두거나 책을 소품처럼 사용해 그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라 화가의 개성이 담긴 관폭도가 나타났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 1685~1766)의 '관폭도'는 물줄기들이 합류하여 장관을 이루는 인물산수화다. 그의 '연옹화첩(蓮翁畵帖)'에 실린 '관폭도'는 고요와는 거리가 멀다. 유명한 폭포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마주하며 감상에 젖는다. 흘러온 물이 모이고 모여서 계곡을 타고 수평을 이루다가 절벽에서 세 갈래로 수직 낙하한다. 물보라가 일고, 찬바람이 날개를 편다.


소나무 밑에는 선비와 시동, 소년 소녀들이 건너편 폭포를 구경하고 있다. 폭포는 더 이상 선비의 전유물이 아니다. 화면 왼쪽에 폭포와 계곡을 배치하여 이상세계를 연출하고, 오른쪽에는 현실 속의 인물들이 이상세계의 폭포수를 바라보는 구성이다. 인물의 표정과 옷자락이 날리는 모습이 풍속화를 연상케 한다. 관폭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천연 에어컨'이 함께하는 피서


차를 달려 팔각산 옥계계곡의 수려한 풍경과 마주한다. 물놀이에 신이 난 사람들을 구경하고 청송 주왕산에 이른다. 우람한 바위산을 지나 폭포 앞에 멈췄다. 옥빛의 물줄기가 쉴새 없이 흘러내린다. 폭포는 소리꾼에게는 득음의 장소였고 화가에게는 창작의 명소였다. 폭포 소리에 귀를 세운다. 물소리가 세상을 넓게 보라고 아우성친다. 폭포는 자연이 선사하는 '천연의 죽비'이자 '천연 에어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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